이에 대한 오호는 극명하게 엇갈려서, 영미권 평단으로부터는 과하게 스타일리시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영국 아카데미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받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2012년 작 베스트10중 4위로 이 영화를 손꼽았다. 19세기 스타일을 재현한 연극무대로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의 작위적이고 타락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극찬을 곁들였다.
문학사상 가장 매혹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한다는 평을 받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1877년 완성한 ‘안나 카레니나’는 무성, 흑백 시절부터 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세계 영화사에 알려진 것만도 12번이다. 라이트의 2012년 작이 13번째 작품이다. 한국에는 그레타 가르보가 출연한 1935년 작, 비비안 리가 출연한 1948년 작, 소피 마르소가 출연한 1997년 작이 잘 알려져있다. 1997년작은 컬러 시대를 맞아 실내장식과 조명이 화려한 러시아 건축물 내부를 재현해 눈을 즐겁게 한다.
라이트 감독의 신작은 이러한 전작들을 극복해야한다는 부담을 진 채 만들어졌다. 한 귀족부인이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버리고 결국 기차에 치여 생을 마감한다는, 웬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얘기에 별다른 기대없이 영화관에 갔다가 경이로운 비주얼의 세계에 눈과 마음을 홀리게 된다.
라이트 감독은 이 연극무대를 굉장히 다양하게 활용한다. 무대는 스케이트 썰매장이 됐다가, 무도회장이 되기도 한다. 뒷배경에 경마장 관람석 풍경이 그려져있는 패널을 세워 극장 내에서 경마장면을 연출한다든지, 혹은 이 배경이 실사로 변화하며 레빈(돔널 글리슨)이 실제세계로 나아가는 환상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나(키이라 나이틀리)가 죽은 후 아들과 안나가 브론스키(애런 존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 카레닌(주드 로)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연극무대의 틀은 마치 액자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흰 들꽃이 만발한 들판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담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도록 한 것도 놀랍다.
배우들은 라이트 감독의 기발함에 경의를 표했고, 주드 로는 이 세트에서 “현실을 잊고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라이트 감독은 “아이디어가 넘쳐서 실제 활용한 것은 10개중 2, 3개 정도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매튜 맥퍼딘)가 일하는 사무실 정경을 뮤지컬적으로 표현한 것도 신선하다. 무의미한 서류작업을 반복하는 공무원들의 일상을 도장을 찍어대는 리드미컬한 춤동작으로 반복하는 신과 같은 것들은 상당한 재미를 준다.
감각적인 왈츠 음악과 함께 안나가 브론스키와 함께 춤을 추는 무도회 장면도 상당히 자극적이다. ‘블랙 스완’을 연상시키는 블랙 드레스를 입은 안나가 마치 남녀가 얽히는 듯한 손사위로 완벽한 댄스 안무를 소화해내는 데서는 절로 박수가 우러나온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이는 격정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냈다. 다소 많이 쓰여 이제는 진부한 기교이긴 하지만, 그 너른 공간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 혹은 시간이 멈춘 듯 카메라 워크와 편집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심리극으로서의 일면을 보여준다.
영화는 단지 안나 카레니나의 파괴적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톨스토이의 원작이 가진 주제의식도 부족하나마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톨스토이 스스로를 반영한 시골귀족 레빈이 농부들과 함께 땀흘리는 모습, 키티(알리시아 비칸데르)와 함께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완성해가는 모습을 적절히 삽입해 이기적 선택에 대비되는 육신과 영혼이 충족한 삶을 아름답게 그린다. 당초 브론스키의 청혼을 기다렸던 공녀(公女) 키티는 레빈과 결혼하면서 화려한 도시의 삶을 버리고 직접 아이를 키우고 환자를 돌보는 성녀 같은 자세로 감동을 준다.
안나를 유혹하는 브론스키 역의 애런 존슨(애런 테일러 존슨)은 아역 출신으로 긴 연기경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 작품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배우다. 금발로 염모해 유리알같은 푸르른 눈, 흰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하며 유약하고 퇴폐적인 외양을 강조했다. 그의 섬세한 매력을 상징하는 듯한 희고 푸른 제복이 여성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라이트 감독은 그가 햇볕 밝은 휴양지에서 올 누드로 안나와 안고 있는 모습을 한 신 삽입해, 의상 안에 숨겨져있는 그의 섹시한 근육질 몸매를 드러내는 ‘센스’를 보여준다. 남녀주인공의 육체적 사랑을 순간적으로 부각시킨다.
애런 존슨은 겨우 23세이지만 무려 스물세살 연상인 부인(영화감독)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부인 샘 테일러 존슨은 그룹 ‘비틀스’의 존 레넌 역으로 그를 성인 연기자 반열에 올려놓은 ‘노웨어 보이’를 연출했다.
키티 역을 맡은 알리시아 비칸데르도 눈여겨봐야할 배우다. 핑크나 흰 드레스를 입고나와 천진하면서도 천사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이 스웨덴 여배우는 덴마크 영화 ‘로열 어페어’에서 영국 공주 출신의 덴마크 왕비 캐럴라인 역을 연기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됐다. 동양적인 조신함을 갖춘 외양과 순수한 매력으로 안나 카레니나와 대비되는 키티 역을 맡아 영화의 또다른 축을 완성했다. 비음이 섞인 울림있는 청순한 목소리도 매력적인데, 배우를 완성하는 것은 목소리임을 다시한번 느끼게 해준다.
영국에서 지난해 9월7일 첫 개봉한 후 각국에서 순차적으로 상영됐다. 한국에서는 다소 늦은 2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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