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전 분야에서 북유럽 스타일이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국민 행복도가 높다는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복지정책, 남녀평등정책을 본보기로 삼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고 인테리어와 가구, 식기, 패션 등 디자인 분야에서도 심플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스칸디나비아풍이 대세다.
한때 국내에서도 ‘덴마크 다이어트’ 열풍이 불기도 했지만, 북유럽식 식단으로 비만예방과 건강향상을 노리는 ‘노르딕 다이어트’와 스키폴을 짚듯이 스틱을 활용해 걷기운동을 하는 ’노르딕 워킹’도 핫 트렌드다.
지난해 영국의 더 타임스는 스칸디나비아식 양육법이 인기를 끌고 있다며 스칸디대디 신드롬을 보도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는 ‘토르: 천둥의 신’과 후속편 ‘토르: 더 다크 월드’ 같은 북유럽 신화를 소재로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웨덴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가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영화화되기도 했다.
게임계가 적극적으로 북유럽 신화를 차용하면서 바이킹부터, 오딘, 토르, 로키 같은 신의 이름, 엘프와 같은 요정, 라크나뢰크(최후의 전쟁) 같은 용어들까지 친숙해졌다.
사실 그 실제적, 심리적 거리만큼 이웃나라 일본까지 점령한 스칸디나비아 열풍이 한국에서는 한 발짝 늦은 감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미 소비에서는 북유럽 스타일이 대세다. 노르웨이 유아용품 브랜드 스토케의 유모차는 ‘아이들 천국’이라는 북유럽 이미지를 업고 없어서 못팔 정도라고 하고, 값싸면서도 최신 디자인으로 무장한 스웨덴 패스트패션 브랜드 H&M과 역시 저렴한 가격, 높은 실용성이 특징인 인테리어 브랜드 이케아가 호응을 얻고 있다.
덴마크 레고그룹의 레고랜드가 강원도 춘천에 2015년 개장을 예정으로 곧 착공하며,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정서적 교감을 중시하는 ‘스칸디맘’을 2013년 트렌드로 꼽기도 했다. EBS는 연초부터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비롯한 복지선진국들을 다룬 다큐프라임 ‘행복의 조건-복지국가를 가다’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에 대중문화의 선봉으로 꼽히는 영화, 이 중 선구적인 덴마크 영화를 필두로 한 북유럽 영화의 국내 개봉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지난해 말부터 ‘로얄 어페어’(감독 니콜라이 아르셀), ‘더 헌트’(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감독 수잔 비에르) 등이 줄줄이 개봉해 호평받으며 비영어권 외국어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입소문 만으로 장기 상영 중이다.
덴마크 국적의 영화는 아니지만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앤 해서웨이와 짐 스터지스의 만남으로 눈길을 모은 ‘원데이’의 론 셰르픽 감독도 덴마크인으로 덴마크 영화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해양경찰 마르코’(감독 얀 리벡)라는 덴마크 애니메이션까지 14일 개봉한다.
덴마크 영화가 한국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아무래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킹덤’(1994)이 1997년 뒤늦게 국내에 소개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 ‘어둠속의 댄서’, ‘도그빌’,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등 그의 작품은 발표되는 족족 국내 팬들에게 화제가 됐다.
최근 1~2년 새 ‘멜랑콜리아’부터 ‘인 어 베터 월드’(덴마크), ‘아르마딜로’(덴마크), ‘밀레니엄’ 시리즈(스웨덴), ‘오슬로의 이상한 밤’(노르웨이), ‘너무 밝히는 소녀 알마’(노르웨이), ‘베이비 콜’(노르웨이) 등 북유럽 영화들과 ‘토르: 마법망치의 전설’ 같은 아이슬란드 애니메이션까지 이례적으로 줄줄이 한국 상영관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다.
지배와 피지배, 왕실간의 혼인과 동맹으로 얽히고 3국 연합을 이루기도 하며 한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 스칸디나비아는 1개국 만의 영화 자본은 영세해 영화 등장 태동부터 유동적인 교류관계가 보편화됐는데, 근대 유명 극작가들의 활동에서 보듯 초기부터 극화에 큰 재능을 보이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단단한 전통을 쌓았다. 1896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덴마크 영화는 단순한 구경거리였던 영화를 에로틱 멜로드라마로 변신시켰다.
‘심연’(1910)에서 세계 최초로 요부 역을 맡은 아스타 닐센은 유럽 전반을 휩쓴 최초의 인기 영화배우가 됐다. 1909년 설립된 스웨덴 스벤스커 영화사는 덴마크 영화의 영향 하에 육성돼 미국에 농후한 키스신과 그레타 가르보로 대표되는 요부 영화들을 수출했고, 여배우들은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포르노필름을 허용했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식도 높다.
‘어둠속의 댄서’(2000)로 역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라스 폰 트리에, ‘더 헌트’로 매즈 미켈슨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토마스 빈터베르그 모두 이 학교를 졸업했다. 수잔 비에르, 론 셰르픽 등 각광받는 여성감독들, ‘로얄 어페어’의 니콜라이 아르셀 감독 등을 비롯한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감독들이 대개 여기서 수학했다.
이 학교의 특징은 소수정예에 현장교육 중심이라는 것이다. 4년 과정의 영화, TV, 애니메이션 연출, 2년 과정의 극작, 4가지 프로그램이 있는데 재학생수는 모두 합쳐야 100명 정도다. 교직원은 무려 50여명이고 유명 외부강사들을 다수 초청하고 있다. 입학시험 시에는 정규학교 졸업장은 전혀 요구하지 않으며 실전 테스트와 인터뷰가 중시된다.
이 학교가 밝히는 교육목표는 각각 학생의 유니크한 재능을 계발하는 것으로 공공에 상영될 수준의 영화나 전국TV에 방영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졸업이 가능하다. 덴마크는 세계적 수준의 교육 인프라를 지니고 있는데 자유교육 전통이 더해져 세계적 예술가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가 각본을 맡은 자전적 영화 ‘에릭 니체의 젊은시절’은 이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테크닉 위주의 상업영화에 반기를 들며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후 오랜만에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도그마95’ 선언의 주축이 되며 획기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영화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표된 이 선언은 결국 흐지부지됐지만 덴마크 영화와 그들이 지향하는 순수성을 알리는데는 성공적이었다.
영국의 더 가디언은 지난해말 이 영화운동이 어떻게 덴마크의 새로운 모습을 이끌어냈는지를 상세하게 다루기도 했다. 도그마95가 덴마크의 TV프로그램, 건축, 요리가 세계 최고가 되는데 영감을 줬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덴마크 감독들이 독특한 나름의 시각을 견지한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인 어 베터월드’, ‘아르마딜로’, ‘더 헌트’ 등 덴마크 영화를 국내 수입해온 엣나인필름 측의 입장도 그렇다. 덴마크 영화여서가 아니라 좋은 영화를 찾다보니 덴마크 영화를 들여오게 됐다는 것이다. 덴마크 영화들에 대한 관객평만 봐도 단순한 오락과 싸구려 감동 이상의 것을 찾는 목마른 관객들에게 한줄기 소낙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적이고 흥미 넘치는 소재를 내세우면서도 묵직한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잔잔한 연출로 생각할 거리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인 어 베터 월드’는 잔인한 반군 대장을 치료해야하는지 고민하는 의사와 학교 폭력과 왕따에 시달리는 그의 아들을 통해 용서와 복수 사이의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다큐멘터리로는 최초로 칸영화제 비평간주간 대상을 받은 ‘아르마딜로’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병사들이 전투에 중독돼가는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며 인간의 본성과 전쟁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로얄 어페어’는 왕실 치정극의 탈을 쓰고 있으나 실패한 사회개혁에 대한 통찰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는 찬사를 받고 있고, 유치원 남자교사의 어린이 성추행 사건을 다룬 ‘더 헌트’는 거짓말, 선입견, 편견이 만든 집단의 믿음이 어떻게 폭력이 돼가는지를 섬뜩하게 그리고 있다.
한편 덴마크 영화가 무성영화 시대 이래로 제2의 황금기를 맞으며 덴마크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덴마크 국가 공식홈페이지는 덴마크 인구가 550만명에 불과해 국제적인 스타가 탄생할 기회가 적었다면서 비고 모텐슨과 매즈 미켈슨을 국민배우로 꼽고 있다. 덴마크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비고 모텐슨은 할리우드에서의 성공 이후 덴마크에서 영웅시되고 있으며, 매즈 미켈슨은 할리우드 영화 ‘007 카지노 로얄’, ‘타이탄’, ‘삼총사 3D' 등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천사와 악마’에 출연한 니콜라이 리 카스와 투레 린드하르트, 올해 개봉을 앞둔 SF대작 ‘오블리비언’의 니콜라이 코스트 왈도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로얄 어페어‘의 크리스티앙 7세 역으로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남우상을 탄 ’생짜 신인‘ 미켈 보에 폴스라르도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문화전문기자 tekim@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