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한글]주시경 ‘국어연구학회’의 독립운동

기사등록 2012/10/01 07:21:00 최종수정 2016/12/28 01:20:02
【서울=뉴시스】이대로의 ‘한글’ <1>

 1910년 일본제국은 이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뒤에 영원히 제 땅으로 만들려고 못된 짓을 많이 했다.

 배달겨레의 얼을 빼려는 교육정책, 문화정책을 폈으며, 동남아와 중국까지 제 땅으로 만들려는 지나친 욕심을 채우려고 우리 겨레를 전쟁터로 몰아 목숨까지 빼앗았다. 우리겨레 얼을 빼버리려는 일 가운데 우리 말글을 못 쓰게 하고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갈고 닦는 이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고문으로 죽게까지 한다.

 1942년에 우리말 말광(사전)을 만들던 조선어학회 학자와 그 일을 돕는 분들을 잡아간 ‘조선어학회 33인 치안유지법 기소 사건’은 항일 투쟁사에 매우 중대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을 잊고 있었으며, 그 정신과 업적을 기리지 않고 있으니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다.

 한글학회는 처음 1908년에 서울 서대문 봉원사에서 주시경의 상동학원 제자들이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창립했다. 한자 나라 중국문화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 말글을 독립하려는 첫 몸부림이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말은 있으나 우리 글자가 없어 중국 한자를 쓰자니 중국 문화 곁가지였고, 그들 문화 식민지였다. 그러니 중국에 끌려 다니고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대왕이 세계 으뜸가는 글자인 우리 글자, 한글을 만들어 주었으나 중국과 그 중국 문화를 섬기는 이들 때문에 50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때 ‘국어연구학회’는 단순한 학술연구단체를 넘어서서 겨레 독립운동단체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이어서인지 한글학회는 지금까지 학술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 말글 독립운동을 함께 해오고 있다. 또한 세종 때 정음청과 언문청, 고종 때 주시경이 독립신문사에 만든 국문동식회, 1907년에 정부가 만든 국문연구소 정신을 살려서 우리 말글로 튼튼한 나라를 만들어 외침을 막고 잘 살아보자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글학회(국어연구학회)가 태어나자 힘을 키울 사이도 없이 1910년에 일본제국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겼다. 그러나 주시경과 그 제자들은 우리 말글독립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 9월 17일 우리말을 국어라고 할 수 없게 되어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을 우리 토박이말로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로 바꾸었다가 1914년 4월에 ‘한글모’로 바꾸고, ‘강습원’이란 말도 ‘한글배곧’으로 바꾼다. 1981년에 ‘한글모죽보기’와 ‘한글배곧죽보기’가 공개되어 그 역사를  바르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주시경은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배재, 한성사범 들 여기 저기 학교를 다니며 계속 한글을 가르치고 서울과 황해도, 경상도들에 조선어강습원을 만들고 그 제자들을 강사로 보낸다. 그의 제자 김두봉 들과 ‘말모이’란 우리말 말광을 만들고 있었고 1914년에 경상도 동래에 조선어강습원을 만들고 최현배를 강사로 보냈다. 그런데 그 해 7월 27일 주시경 선생은 갑자기 뱃병으로 병원에 갔다가 돌아가신다. 이 때 주시경 선생 나이는 39살 젊은 나이였으며 오래 전부터 앓던 죽을병도 아닌데 그렇게 병원에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은 평소에서 주시경 선생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이 병원에서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주시경 선생은 돌아가셨지만 제자들을 그 제자들이 그 뜻을 이어간다. 스승 주시경을 모시고 ‘‘말모이’라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던 김두봉은 스승이 돌아가신 뒤 1916년에  주시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조선말본’을 신문관에서 출판한다. 그러나 그는 1919년 삼일운동에 가담한 뒤에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나 1921에 주시경의 제자인 임경재, 최두선, 신명균, 이규방, 이승규, 권덕규, 장지영 들이 ‘조선어 연구회’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활발하게 활동한다.

 조선어연구회는 1926년에 가갸날을 만들고, 1927년에 학술 연구지인 ‘한글’을 내기 시작하고,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을 바꾼다. 1929년에 이극로가 독일에서 와 조선사전편찬회를 만들고, 1933년에 한글맞춤법을 만든다. 1936년에 표준말을 정하고 1940년에 외래어표기법을 정한다. 이 일들은 우리말 말광을 만드는 밑바탕이었으며, 말광은 우리 말글독립 첫걸음이었다. 또한 이 일은 일제로부터 광복한 뒤에 튼튼한 나라를 세울 준비였다. 그래서 이 일에는 국어학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겨레 독립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하는 많은 지사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일제는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우리말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고 쓰지도 못하게 했다. 그 겨레의 말은 그 겨레의 얼이고 핏줄이나 마찬가지니 배달말을 없애버리려는 것이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편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말광(사전)을 만드는 학자와 그 후원자를 모두 잡아 조사하고 감옥에 가둔다. 33명을 기소하고 1942년 12월 감옥에 가두고 48 명을 증인으로 경찰에 잡아가 고문도 했다고 한다. 함흥 감독에서 모진 고문과 추위로 한징, 이윤재 두 분을 감옥에 돌아가신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이 되어 다른 분들이 풀려난다. 그 때 일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련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http://cafe.daum.net/hanmal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