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형제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댄스 밴드를 매니지먼트하던 부친과 싱어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8년 부모를 따라 호주로 이민했다.
깁을 비롯해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난 형제들은 1956년 '브라더스 깁'의 첫 자를 딴 아마추어 록그룹 'BG스'를 결성, 시드니 중심으로 활동했다. 1962년 '비지스(Bee Gees)'로 이름을 고쳤다.
1963년 자신들이 작사·작곡한 싱글 '더 스리 키시스 오브 러브(The Three Kisses Of Love)'를 발표하며 프로 무대에 나섰다. 1966년 싱글 '스픽스 & 스펙스'가 히트하면서 호주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1967년 영국으로 건너가 드러머 콜린 피터슨과 기타리스트 빈스 멜러우니를 영입했다. 같은 해 레코드업계의 거물로 통하는 로버트 스틱우드의 지원으로 현지 데뷔 싱글 '뉴욕 미닝 디재스터(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을 내놨다.
빠른 성공은 그러나 부작용을 동시에 불렀다. 음악적인 견해로 피터슨과 멜러우니가 연이어 탈퇴하면서 1969년 해체했다. 로빈은 이후 솔로, 배리와 모리스는 듀오로 활동했으나 예전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깁 세 형제가 1970년대 말 '돈트 포겟 투 리멤버'를 발표하면서 다시 뭉쳤다. 서정적인 발라드를 들려주던 예전과 달리 '유 슈드 비 댄싱',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삽입곡 '새터데이 나이트 피버' 등 댄스 음악을 발표하며 디스코의 창시자가 됐다. 이후 '하우 딥 이스 유어 러브' '스태잉 얼라이브' 등의 히트곡을 내면서 슈퍼스타로 군림했다.
1997년 '록&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의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헌정됐다. 그래미 어워드에 총 16차례 후보에 올라 7차례 상을 탔다.
로빈은 2010년 결장암 판정을 받은 뒤 복부 통증 등으로 몇 차례 입원했다. 올 초 암을 이겨낸 것으로 알려졌으나 다시 병세가 악화했다. 3월에 추가 수술을 받았고 지난달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나기도 했다. 타이타닉 호 침몰 100주년을 맞아 아들과 함께 첫 클래식 앨범 '타이타닉 레퀴엠'을 발표하고 공연을 열 예정이었나 모두 취소됐다.
앞서 모리스는 2003년 심장마비, 막냇동생 앤디는 1988년 코카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비지스는 맏형 배리만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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