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허연, 문학 승리 아니다…'내가 원하는 천사'

기사등록 2012/05/20 10:34:29 최종수정 2016/12/28 00:41:43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마당 하나 가득 깨어진 구슬로 가득하다. 나는 여전히 깨어진 구슬 한가운데 서 있다. 구슬이 나를 때린다. 뼈로 들어서는 통증. 나는 뼈아프게 서 있는 나무다. 자라지 못하는 나무다." ('자라지 않는 나무' 중)

 시인 허연(46·매일경제신문 기자)씨가 4년 만에 세 번째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를 펴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받아 시단에 나온 허씨는 1995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로 쓸쓸하면서도 세련된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을 받았다. 2008년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는 도시 화이트칼라의 자조와 우울을 내비쳤다.

 이번 시집에서는 삶의 허망하고 무기력한 면면을 담담히 응시한다. 완벽한 부정성의 세계를 증언, 온전한 긍정의 가능성을 찾아 나간다.

 "마을에 바람이 심하다는 건, 또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밀밭의 밀대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언덕 위 백 년 넘은 나무 하나가 흔들리는 밀밭을 쳐다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바람의 배경' 중)

 일상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 비탄에 빠지지 않는 건조함을 유지한다. '지독한 슬픔'이 수백만 년에 걸쳐 별일 아닌 듯 있어왔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데 이를 통해 가장자리로 밀려나 고립된 개인이 부유하고 세계의 왜곡이 고발된다.  

 "소혹성의 부족들은 부재를 통해 자신의 예외적 가치를 보여준다. 살아남은 부족들은 시간을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슬퍼진다. 어머니. 나의 슬픈 마다가스카르." ('나의 마다가스카르 3' 중)

 허씨의 공화국은 '마다가스카르' 연작에서 구체화된다.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는 수십 만 년 동안 대륙과 괴리, 인간의 간섭 없이 자연스러운 진화를 겪은 공간이다. 훼손되지 않은 날것의 세계이자 영원히 고립된 공간은 개인의 고독한 삶을 표상하는 다른 이름이다.

 "그가 남긴 복제품들은 오늘도 이 장례 습관에 익숙해진다. 강력하고 조용한 저녁에 후회란 없다. 초원에서 죽음은 객관적이다. 세상이 몹시 좋았다고 짹짹대는 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 ('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 중)

 살아 있음에도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일상을 기계적으로 무기력하게 반복하는 현대인의 삶을 비관하는 태도에서 세계와 불화하는 기억을 갈구한다.

 문학평론가 김나영(29)씨는 "서서히 죽어가면서 한생을 반증하는 몸뚱어리처럼, 허연의 시편들은 기꺼이 낱낱의 부고가 되어 이미 없는 시간과 존재들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되는지를 증언한다"며 "아버지가 비닐에 싸온 빛바랜 결혼사진처럼, 쓸쓸하고 허망해 보일지라도 희망을 예감케 한다"고 읽었다.  

 허씨는 "내 시는 나만의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며 "따라서 몇 명의 독자들이내 공화국을 찾아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승리일 뿐 결코 문학 정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 부족 공동체에서 시를 적는 나는 제사장이자,사라져버린 부족들의 과거를 불러오는 확신범이다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들에게이 시집을 헌정한다." 124쪽, 8000원,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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