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커? 요즘 같으면 당연히 컴퓨터 해킹하는 ‘해커’를 떠올릴 테지만 당시는 컴퓨터 해킹이라는 말이 존재하지도 않을 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란다. 그러자 그 선임은 HQ라는 팻말이 있는 건물로 선배를 데리고 가서 “저기를 핵커라고 하는 거야, 임마”라며 자랑스럽게 설명해 주더란다. 그제야 알겠더란다. 영어를 모르는 그 선임에게는 미군들이 본부중대를 의미하는 Head Quater(헤드쿼터)를 발음하는 게 ‘핵커’로 들렸던 것이다. 그 선임이 HQ라는 영어 약자의 본딧말과 그 의미를 알았다면 보다 쉽게 설명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Head Quater를 ‘헤드쿼터’라고 하는 것보다 ‘핵커’라고 하는 것이 원음에 더 가까울 수도 있지만 보통의 한국인은 헤드쿼터라고 얘기해 줘야 쉽게 알아듣는 게 현실이다).
국방부가 해병대 용어를 육군 식으로 바꾸라고 한 것을 두고 해병대 예비역들이 ‘전통 파괴’라며 반발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핵커’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HQ’의 원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가 “‘핵커’도 모르냐”며 남을 꾸짖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용어가 순검이다. 순검(巡檢)이라는 해병대 용어를 ‘야간 점호’로 바꾸라는 것이 국방부의 ‘권고’라고 한다. 점호(點呼)는 육군이 쓰는 용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순검은 일제 시대 용어인데다, 가혹행위 등 병영 내 악습에 영향을 미치므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게 국방부의 설명이라고 한다.
우선, 순검이라는 용어가 사라지면 병영 악습이 개선될 것이란 발상부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는 현재 해병대 뿐 아니라 해군도 순검이라는 용어를 쓴다. 순검이라는 용어가 병영악습의 원인이라면 해군도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해군의 경우는 병영악습 논란도, 순검 용어 폐지 논의도 없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왕 용어를 바꾼다면 제대로 된 용어를 대안으로 제시할 일이다. 점호의 국어사전 뜻풀이는 ‘한사람씩 이름을 불러 인원이 맞는가를 확인함’이다. 그러나 이는 한자단어 구성 원리에 맞지 않는 억지다. 점(點)이라는 한자에는 ‘점찍다’, ‘조사하다’, ‘징집하다’ 등의 뜻이 있다. 호(呼)에는 ‘부르다’, ‘숨을 내쉬다’, ‘소리치다’ ‘슬프다’, ‘아(탄식의 소리)’ 등의 뜻이 있다. 점호(點呼)하면 ‘점(點)아!’라는 뜻은 될지언정 ‘이름을 부르다’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 호(呼)는 통상 ‘呼+인명’의 형태로 써서 ‘누구(인명)를 호출하다(부르다)’는 식으로 쓴다. 중국어에는 점호라는 말이 없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점호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점호에 해당되는 말로 점명(點名-명부의 이름을 차례로 점을 찍어가며 부름), 혹은 점고(點考-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가며 사람의 수를 조사함)이라는 말이 쓰인 기록이 있을 뿐이다.
점호의 일본어 사전 뜻풀이는 ‘한사람씩 이름을 불러 인원이 맞는가를 확인함’이다. 그 단어와 뜻풀이를 한국어 사전이 그대로 베껴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 사전에는 ‘각개점호’ ‘간열점호’ 등 점호라는 말의 용례도 많이 나온다. 呼의 일본어 훈독은 ‘부름’으로 굳어져 있으며, 부름이라는 말에는 ‘이름을 부름’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점호는 우리가 한국식으로 읽기는 하지만 사실은 일본에서 만든 ‘순 일본말’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순검(巡檢-순찰하여 살핌)은 중국어에도 있는 단어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말이다. 조선 시대에 ‘밤마다 순장과 감군이 맡은 구역 안을 인정(人定)부터 파루(罷漏)까지 돌아다니며 통행을 감독하던 일’을 순검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경무청에 속해 있던 판임관 벼슬로, 지금의 순경과 같은 말로 쓰였다.
그렇다고 지금 해병대에서 쓰는 순검이라는 용어가 조선시대에 썼던 순검이라는 말을 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순검은 일본어에도 있다. 일본어 사전에 나온 순검의 용례를 보면 ‘소등(消燈) 시 숙소 내부를 순검하다’, ‘함내(艦內)를 순검하다’처럼, 오늘날 해군이나 해병대에서 쓰는 것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아마도 일본군, 특히 일본 해군이 쓰던 용어가 한국 해군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러나 어쨌든 순검은 우리 조상들이 썼던 우리말이다. 조선시대의 그 뜻 그대로 지금 가져다 쓴다고 해도 크게 어폐가 없다. 점호라는, 사실상 ‘순 일본말’에 비하면 양반이다. 일본식 용어를 배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순검을 점호로 대체하라는 것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폐지하려면 오히려 점호라는 말을 폐지해야 마땅하다.
한국 군대에서 점호라는 말은 ‘일조(日朝)점호’ ‘일석(日夕)점호’ 형태로 많이 쓰인다. 아침 점호, 저녁 점호라는 뜻이다. 일조라는 말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일석은 저녁이라는 뜻이라고 돼 있다. 두산동아프라임의 일본어사전은 일석을 ‘낮과 밤’, ‘저녁’의 두 가지 뜻으로 풀이했다. 일조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중국어 사전에는 일조도 일석도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日朝라는 말은 한중일 3국의 사전에도 없는 출처 불명의 말이다. 되지도 않는 한자말을 멋대로 만들어 쓰고 있는 셈이다. 어법에도 맞고, 알아듣기도 쉽게 아침점호 저녁점호라고 하면 될 일이다.
관물대라는 말도 고쳐야 할 말이다. 관물대는 관물(官物-관청 소유의 물건)을 놓아두는 대(臺)라는 뜻일 게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과거 군대에서는 서로의 보급품을 훔쳐가는 좀도둑질이 적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관물은 개인 것이 아니라 군 공동소유의 물건이라는 의식이 작용했다고 본다. 시대가 변했다. 현재 병사들이 ‘관물대’에 두는 물건에는 개별 병사에게 지급돼 이미 사물(私物-개인의 물건)이 된 것이 적지 않다. 더 이상 관물대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기왕 군대 용어 개선 얘기가 나왔으니, 차제에 용어의 유래와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제대로 고쳤으면 한다. 엘리트 고위 장교도 모르는 어려운 한자어, 근원도 모르는 외래어는 정비해야 한다. 요즘 신세대는 한자용어의 경우 그 본래 뜻과 독음을 몰라 ‘핵커’처럼 대충 말하는 따라 말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군대 용어 해설집’을 만들어 일선 부대에 비치케 함으로써 병사들로 하여금 자기가 쓰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쓰도록 하면 용어정비도 되고 한자나 외국어 공부에도 보탬이 되는 일석이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윤승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