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고 실험정신 투철한 의학도는 그 실험에 따른 결과로 탄생시킨 새로운 이론으로 인류에게 크게 공헌하겠지만, 여타 동물들에겐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일 따름이다. 상상해 보라! 동물실험이라는 명분 아래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목숨을 잃었겠는가? 그런데 목숨까지 앗아가진 않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인 멍멍이에게 남성호르몬을 주입해서 정말 개 버릇을 취하게 만든 실험도 있었다.
남성호르몬의 성격적 측면을 웅변하는 이 실험은 다음과 같다. 전봇대에 한쪽 뒷다리를 쳐들고 ‘쉬야’를 하는 개는 생후 20주쯤은 넘긴, 인간으로 따지면 사춘기 정도는 지난 성숙한 수컷뿐이다. 호적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강아지가 다리를 들지 않는 건 물론이고, 암컷 역시 다리를 벌려 대는 버릇없는 짓은 하지 못해 쭈그려 앉은 채 일을 처리한다. 그런데 전봇대에 별무관심이던 수컷 강아지에게 남성호르몬을 주사하면, 생후 12주경부터는 어른 흉내를 곧잘 낸다.
또 성숙한 암캐에게 주사해도 역시 꼴사납게 다리를 치켜 올렸다고 한다. 이런 실험은 개의 자연스런 방뇨(放尿)자세를 인간적 감각으로 따져 예절 없는 개 버릇이라고 폄하(?)하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바로 주입된 남성호르몬의 증감(增減)에 따라 개 같은 버릇을 보이는 멍멍이를 통해 남성호르몬이 인간에게는 어떤 작용을 할 지 추론코자 한 것이다.
남성호르몬만 예로 들었지만 아무튼 성호르몬은 남녀의 생식·성징·성행동은 물론, 본능적 욕망이라는 성욕, 아울러 최근 관심을 끄는 성격까지 좌지우지하는 물질로 인식되고 있다. 성 호르몬 하면 독자들께서는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젠, 안드로젠, 여성호르몬, 남성호르몬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남성호르몬이 곧 안드로젠인 것처럼 똑같은 호르몬인데도 다른 명칭으로도 불리는 까닭에 혼동될 때가 많으니 이번 기회에 정리 좀 해보자. 레이디 퍼스트!
흔히 난소호르몬이라고도 일컫는 여성호르몬은 난소에서 분비되는 난포호르몬(estrogen)과 황체호르몬(progesterone)을 총칭한 것이다. 물론 성인 여성의 난소에서 만들어지는 호르몬은 이 두 종류 이외에도 많지만, 통상적으로 여성호르몬이라 하면 이 두 가지를 뜻한다.
단순히 계집아이가 아니라 매달의 달거리로 생식능력을 갖춘 엄연한 성인 여성임을 나타내게도 하는 난포호르몬(estrogen)은 크게 세 가지 생리작용이 있다.
첫째, 난포호르몬은 여자의 정상적인 성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생식기인 질, 자궁, 난관 등의 성장과 2차 성징의 발현을 촉진한다. 체내의 지방 분포에도 영향을 미쳐 풍만한 히프와 유방 등을 만듦으로써 속칭 ‘쭉쭉빵빵’한 여성 체형으로 변모시킨다.
둘째, 전반적인 신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여성의 부드러운 피부를 유지시키고, 뼈에 대한 부갑상선 호르몬의 작용을 억제해서 골 흡수를 감소시킨다. 또 혈중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 여성이 상대적으로 장수(長壽)하는데도 한 몫하고, 여러 혈액응고인자를 증가시켜 혈액의 응고성도 높여준다. 한편 남성호르몬과 달리 단백대사에는 두드러진 작용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암컷의 동물에게 작용하는 발정(發情)작용이다. 발정이란 뉘앙스가 점잖지 못해 혹 항의하는 여성 독자도 있겠지만,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왜냐하면 이 발정작용은 난포호르몬이 뇌의 시상하부를 자극해서 성중추를 흥분시키기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인간의 성충동 발현에는 그다지 두드러진 작용을 발휘하지 않고 동물의 암컷에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여성호르몬인 황체호르몬(progesterone)은 주로 자궁에 작용해서 자궁을 임신준비상태로 만든다. 즉 자궁내막의 분비기능을 증가시켜 수정란(受精卵)이 착상하기 쉽게 준비시키는 것이다. 또 뇌의 체온조절중추에도 작용해서 이른바 기초체온을 상승시키니, 농담으로 여성을 변온동물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인자(因子)에 관해 설명했던 부분을 돌이켜보면, 독자들께서는 이 여성호르몬들의 화학구조도 궁금해질 것이다. 여성호르몬들은 구조식 속에 모두 사이클로펜테노페난트린(cyclopentenophenanthrene)핵이 있는 게 특징이다. 중고등학교시절 둥근 고리모양의 이중결합을 세 개 가진 벤젠(benzene)환(環)을 지긋지긋하게 외웠던 사람들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겠지만 시험 치를 것도 아닌데 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는 공자님 말씀을 떠올리면 오히려 즐겁지 않은가?
아무튼 여성의 난소는 콜레스테롤로부터 여성호르몬을 합성하는데, 난소의 세포에 따라, 또 합성과정에 관여하는 효소 등에 따라 에스트라다이올(estradiol), 에스트라이올(estriol), 에스트론(estrone), 프로제스테론(progesterone), 프레그네인다이올(pregnanediol) 등의 여성호르몬이 만들어진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난포호르몬(estrogen)은 에스트라다이올, 에스트라이올, 에스트론의 총칭이며, 황체호르몬은 프로제스테론, 프레그네인다이올의 총칭이다.
화학구조식이 규명된 만큼 이들 호르몬들은 현재 모두 인공적으로 합성해서 생산할 수 있으며, 또 합성제품이 천연의 것보다 작용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에는 남자 차례다. 테스토스테론이라고 했다가 안드로젠이라고도 했다가 남성호르몬이라고도 하는 바로 그 호르몬이다. 그런데 에스트로젠(estrogen)이 난포호르몬인 것처럼 사실 안드로젠(androgen)의 우리말 이름이 남성호르몬이다. 그럼 테스토스테론은? 차츰 밝혀질 것이다.
안드로젠(androgen)은 ‘남성이나 수컷’을 뜻하는 접두어 ‘안드로(andro: man)’에 ‘산출하다, 생산하다’의 뜻을 가진 ‘젠(gen: gennan to produce)’의 합성어다. 이름이 비슷한 까닭에 밤하늘의 안드로메다(Andromeda) 성좌(星座)를 혹 떠올릴 수도 있지만, 아쉽게도 안드로메다는 제우스(Zeus)의 아들 페르세우스(Perseus)가 구해 준 미녀이니 남성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튼 글자가 의미하는 그대로 안드로젠은 ‘남성을 만들어내는 물질’이다. 또 호르몬의 자격에 해당하는 작용기전과 화학구조식이 밝혀졌으므로 남성호르몬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여성호르몬이 난소에서 분비되는 것처럼 남성호르몬은 고환에서 분비된다(물론 부신副腎에서도 전체의 5% 정도가 분비된다). 그러면 ‘남성화’로 압축되는 이 남성호르몬의 생리작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첫째는 남성 성기의 발육을 촉진하고, 2차 성징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태아의 발생 과정에서도 남성의 내·외생식기의 적절한 분화를 위해 필수적인 이 호르몬은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어 음경은 물론 음낭, 부고환, 정낭, 전립선 등을 발육시킬 때도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다. 또 변성기(變聲期)에 사춘기 남성 목소리가 저음화(低音化)되는 것도 이 호르몬의 작품이다. 따라서 사극(史劇)이라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사춘기 이전에 거세한 내시(內侍)는 2차 성징이 발현되지 않아 수염 없는 말끔한 턱에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둘째는 단백질 합성 작용이다. 즉 단백질 대사에 관여해 남성의 골격과 근육을 형성하니, 의학에서는 이런 생리작용을 이용해 미숙아의 체중증가 목적으로도 응용한다.
셋째로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라는 성욕이다. 즉 남녀 모두에게 성욕을 항진시키는 작용은 이 남성호르몬에 의한 효과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임상적으로 고환 결손이나 고환 기능부전증의 환자에게는 뚜렷한 효능을 발휘하며, 동물실험에서도 두드러진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정상 남성에게는 남성호르몬의 투여가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더러, 과잉 투여 시에는 오히려 중추신경을 억제해서 역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뇌하수체, 시상하부 등 중추에 관한 작용이다. 남성호르몬의 분비는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성선자극 호르몬 중 황체형성 호르몬의 자극에 따라 분비가 촉진된다. 그런데 아직 어리거나 젊은 동물에게 대량의 남성호르몬을 투여하면 성선자극 호르몬의 분비가 억제되고, 그 결과 고환 발육이 억제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체내 정상적인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소위 항상성(homeostasis)을 지키려는 되먹이기 기전(feedback system)의 자동조절에 따른 것이다.
남성호르몬도 여성호르몬처럼 스테로이드(steroid)호르몬이므로, 화학구조식에 사이클로펜테노페난트린(cyclopentenophenanthrene)핵이 들어있다. 또 고환에서 분비되는 세포나 효소 등에 따라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 안드로스테론(androsterone), 디하이드로에피안드로스테론(dehydroepiandrosterone) 등 여러 종류의 남성호르몬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남성호르몬(androgen)이라고 하면 이상의 모든 호르몬을 총칭한 것이며, 그 중 테스토스테론이 95%가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남성호르몬 하면 곧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등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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