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유닛 천상지희 다나&선데이가 싱글 ‘나 좀 봐줘’를 내놓았다.
천상지희 그룹명이 들어간 정식 국내활동은 지난 2007년 ‘한 번 더, OK’ 이후 4년여 만이다. 그동안 멤버 스테파니는 발레 커리어를 이어갔고, 린아는 쇼핑몰 사업을 하며 뮤지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액면 그대로는 그룹 와해상태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유닛 활동은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가 과연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심판대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동방신기와의 커플링으로 야심차게 시작한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가 어쩌다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된 걸까. 그리고 SM엔터테인먼트가 그런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은 또 뭘까. 하나씩 살펴보자.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최대 악재는 아무래도 ‘시대’ 그 자체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2005년 싱글 ‘Too Good’으로 정식 데뷔했다. 당시까진 그냥 천상지희로만 불렸다. 그런데 이 시기는 사실상 아이돌의 암흑기에 가까웠다. 21세기 초반 1세대 아이돌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 등이 모두 해체 또는 활동중지에 들어가면서 아이돌 1차 붐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시장을 주도하던 SM엔터테인먼트조차 R&B 듀오 플라이투더스카이와 소녀솔로 보아를 론칭시키며 1세대 아이돌 개념에서 탈피하려 애썼고, 실제 시장분위기도 딱히 아이돌에 후하질 않았다. 아이돌은 저질상품, 싸구려 상혼(商魂)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 아이돌로 국한시켜 봤을 때, 차세대로서 론칭됐던 밀크, 신비, 블랙비트 등은 모조리 실패해버리고, 신화 정도만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시점이었다.
그러다 2004년 동방신기가 데뷔 즉시 성공을 거두면서 아이돌시장은 갑작스레 부활의 조짐을 맞이하게 됐다. 이를 놓고 일각에선 동방신기의 ‘실력파’ 이미지가 아이돌에 대한 편견을 깼다는 분석이 제시됐다. 어쩌면 정말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커플링 개념처럼 기획됐던 게 바로 ‘여성판 동방신기’ 천상지희였던 것이다. 동방신기처럼 아카펠라 팝 댄스그룹으로 홍보되면서, 걸그룹으로선 최초로 ‘실력파 아이돌’ 개념을 적용시켰다.
그러나 이 개념은 걸그룹에 적용시키기에 아직 일렀다. 실력파 여성 아이돌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층의 지지로 먹고사는 존재다. 그런데 그 중심이 되는 20~30대 여성층은 당시 이미 R&B 등을 구사하는 미디어템포 가수들로 선택을 바꾸고 있었다. 소몰이창법 등 화려한 가창기교가 20~30대 여성층 정서를 휘두르던 시점이었다.
결국 남은 건 10대 소녀 팬들밖에 없었는데, 당시 소녀 팬들은 아이돌산업의 유사연애(類似戀愛)적 속성에 깊숙이 지배받고 있었다. 아직 동성 아이돌에 동경 심리를 느껴 지지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소녀 팬들은 천상지희에 호감은커녕 ‘여자 동방신기’란 홍보 콘셉트에 되레 거부감을 일으키며 안티로 돌변해버리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은 천상지희 론칭 시점은 물론, 2007년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등이 등장한 시점까지도 크게 달라지질 않았다. 그나마 신진 걸그룹들은 상대적으로 남성층 구미에 더 적응한 콘셉트였지만, 시장 자체가 걸그룹 수용에 경직돼있어 뻗어나가기 쉽지 않았다.
대중이 마침내 걸그룹에 동의를 보내기 시작한 건 걸그룹들이 후크송을 앞세워 음악적 유행을 주도하면서부터다. 콘셉트가 아닌 음악이 대중의 경직성을 부순 것이다. 원더걸스의 ‘텔미’, 소녀시대의 ‘지’가 그 방아쇠 역할을 했다. 남성층은 다시금 걸그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유행의 물살이 거세자 급기야는 여성층도 넘어갔다. 그 시점이 2009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해,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가 4년 전 표방했던 실력파 아이돌 개념을 들고 걸그룹 2NE1이 등장해 시장을 초토화시키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시장상황이 자신들 콘셉트에 맞아떨어지기 무려 4년 전 론칭된 탓에 날개 한 번 펴보지 못한 채 ‘실패한 옛날 그룹’ 이미지만 덮어쓰게 된 것이다. 이것이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실패의 대전제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실패를 100% ‘시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시대’의 벽에 부딪혔더라도 대중문화산업에서 ‘시대’란 난공불락의 장벽이라 볼 수만은 없다. 전략만 잘 세우면 ‘시대’에 적응해가며 자기 최소영역을 보전하는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그런데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자신들에 불친절한 ‘시대’의 문제를 액면 그대로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세부적 전략들이 모조리 엇나가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멤버 선정에서부터 한국 아이돌산업 속성을 오판하고 있었다. 아이돌 개념을 처음 확립시킨 일본시장에서 아이돌은 친근감으로 무장한 상품이다. 그래서 그룹 결성 이전부터도 쟈니스 주니어, 헬로 프로젝트 키즈 등 기획사 연습생 집단을 꾸준히 미디어에 노출시켜 인지도를 쌓은 뒤, 그 중 ‘될성부른’ 연습생들을 묶어 데뷔시키는 방식이 유행했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친근감이나 신뢰감보다는 신선감이 중시되는 시장이다. 처음 등장할 때 완전히 새로워야 한다. 알더라도 해당 연예기획사 열혈팬층이나 알아볼 얼굴이어야 한다. 그런데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애초부터 일반인들마저 아는 얼굴들을 모아놓았다. 그룹의 얼굴이 된 다나(당시는 희열다나라 불렸다)는 이미 2001년 데뷔해 2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 ‘기성 솔로가수’였다. 웬만한 대중도 다 알만한 얼굴이었다.
린아(당시는 상미린아라 불렸다)도 다나만큼은 안 됐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멤버였다. 2002년 데뷔한 여성 듀오 이삭N지연에서 지연이란 이름으로 연예계 신고식을 치룬 멤버였다. 2004년 이삭N지연이 해체하고 난 뒤 린아로 개명하고 천상지희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식이면 당연히 대중입장에선 신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재활용 그룹 같은 이미지가 밴다. 특히 그룹 ‘얼굴’로 설정된 멤버가 이미 솔로로서 얼굴을 알린 인물이라면 사실상 그룹 전체의 론칭에 더더욱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포미닛이 상당기간 동안 ‘현아 그룹’으로 인식된 채 여타 멤버들 론칭이 어려웠던 것도 그 탓이다.
다음으로 천상지희는 론칭의 핵심이 되는 ‘데뷔곡’ 선정에서 오판을 내렸다. 데뷔곡 ‘Too Good’은 발라드 곡이었다. 팝 댄스그룹 데뷔곡을 발라드로 정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기이한 선택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창력이 받쳐주는 실력파 아이돌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어 설정된 전략이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이돌은 아이돌이고 댄스 그룹은 댄스 그룹이다. 자기증명을 했어야 했다.
대중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데뷔곡이 자기증명을 제대로 못 하니 당연히 반응도 좋질 않았고, 도미노처럼 이후도 순탄치 못했다. 데뷔곡의 주박은 2년 뒤인 2007년 섹시 콘셉트 댄스곡 ‘한 번 더, OK?’가 발매될 즈음에야 풀릴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부터가 진짜 최악이다. ‘한 번 더, OK?’는 확실히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잘못된 론칭 과정을 상당부분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은 성공했다. M.net 엔카운트다운에서 1위를 차지하고, SBS ‘인기가요’에서도 뮤티즌송에 선정됐다. 연말 대중음악시상식에서도 ‘한 번 더, OK?’는 MKMF 댄스음악상을,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이름으론 제14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에서 여자그룹가수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 팬카페 ‘드리밍’ 회원수는 10만 명을 돌파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그런데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이 시점에 제대로 국내활동을 펼칠 수가 없었다. 이미 2006년부터 일본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했는지도 알 수 없다. 보아의 성공사례에 따른 ‘무조건 보내놓고 보기’ 발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일본시장 상황도, 한류에 대한 인식도 모두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에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조건 일본으로 갔다. 그렇게 등장한 일본 데뷔 싱글 ‘부메랑’은 오리콘 110위, 두 번째 싱글 ‘The Club’은 131위, 세 번째 싱글 ‘Sweet Flower’는 151위를 차지해 점점 더 차트에서 밀려나고 있었지만,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를 놓고 시도된 한류 실험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한 번 더, OK?’ 성공으로 이제 막 국내인지도를 높여보려는 시점에 이르러서도 또 다시 일본으로 출국해야 했던 것이다.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일본에서 5번째 싱글 ‘Piranha’를 발표했고, 계속해서 ‘Stand Up People’ ‘Here’ 등을 내놓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얻지 못했다. 국내활동을 방해할 정도로 일본에 집중해 얻어낸 최고성과라 봤자 ‘Here’가 거둔 오리콘 위클리 18위 정도였다. 이듬해 일본에서 정규2집앨범 ‘Dear...’를 발표했으나 실망스런 결과만을 낳았고, 2009년 3월 ‘Dear...’의 일본 라이브 투어를 끝으로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실질적 활동은 중단돼버렸다.
그렇게 무리한, 그리고 의미 없는 일본 활동에 집중한 탓에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론칭 초기 실패를 만회하고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도를 쌓을 절호의 기회조차 놓쳐버리고 만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한류 붐이 낳은 흔치 않은 피해자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밖에도 지적할 만한 부분은 많다. 2006년 말 천상지희를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부터가 실수였다는 의견들이 많다. 부르고 외우기도 힘들뿐더러, 한 번 실패해 그룹명을 바꿔버렸다는 인상을 줘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다는 지적이다. 일본에 더해 중화권활동까지 꾀한 점이 이미지 면에서나 실질적 론칭 스케줄 면에서 무리를 줬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2009년부터라도 멤버들을 다잡아 설욕전에 나섰어야 했는데, 그 시점을 실기(失期)해버리니 대중 입장에서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를 ‘이미 해체된 그룹’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비판도 종종 나온다.
현 시점에 이르러선, 그나마 그룹 살려보겠다고 등장한 천상지희 다나&선데이의 ‘나 좀 봐줘’마저도 에러라는 비판이 크게 일고 있다. 데뷔 7년차 ‘중견’의 풍모가 전혀 안 느껴지는 싱글인데다 가사까지 시대착오적(김주원과 독고준 등 능력남들이 판타지를 북돋는 취업 불황 절정기에 남자 따윈 필요 없다는 1990년대식 걸파워 가사를 내놓았다)이란 지적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극악한 상황임에도 SM엔터테인먼트가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정확한 회사 내부 사정이야 알 수 없겠지만,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SM엔터테인먼트에서 ‘실력파’ 콘셉트 걸그룹은 예나 지금이나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 현 시점 기준으로 봤을 때 론칭 자체는 틀리지 않았는데, 멤버들 개개인의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지금처럼 실력파 아이돌 콘셉트를 걸그룹 중 2NE1 혼자만 독식하고 있는 상황에 아쉬움을 느껴서는 아닐까. 서른이 넘는 멤버들이 득실대는 중견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가 ‘아브라카다브라’로 이미지 변신해 대성공을 거둔 전례를 보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발상으로 욕심을 부린 까닭은 아닐까.
어찌됐건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가 현 시점 아이돌업계에서 일종의 반면교사로서 역할하고 있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힘들 듯 싶다. 한 마디로,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처럼만 안 하면 패망은 면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모든 지점에서 틀려있었다. 사실 억지로라도 그렇게 계속 틀리고 실패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설상가상으로 천상지희 다나&선데이의 ‘나 좀 봐줘’는 가온차트 7월 넷째 주 순위에서 26위로 등장한 뒤, 계속 하락세를 면치 못하며 8월 둘째 주 현재 61위까지 추락한 상황이다. 회생의 마지막 승부수마저 실패로 돌아간 모양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대한 왕국이 소멸한 모습은 후진 공화국이 소멸한 모습보다 훨씬 더 슬프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적어도 아이돌산업에 있어서는, 잘 나가던 아이돌이 패망하는 모습보다 제대로 꽃피워보지도 못한 아이돌이 아슬아슬하게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모습 쪽이 훨씬 더 구슬프다.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라보며, SM엔터테인먼트가, 아니 한국 아이돌산업 전체가, 다시는 이 같은 피해사례를 남기지 않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