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공연예술 가부키, 처음에는 음란유희

기사등록 2011/04/23 08:31:00 최종수정 2016/12/27 22:04:36
【서울=뉴시스】윤소희의 음악과 여행<45>

 ‘노’와 ‘분라쿠’의 두 줄기 강물이 도쿄라는 바다로 흘러와서 ‘가부키’라는 일본 최고의 공연예술이 되기까지에는 갖가지 사연들이 있다. 가부키가 처음 생겨날 때는 음란한 유희라고 하여 지체 높으신 양반들의 잔소리를 꽤나 들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분라쿠’의 재미난 이야기와 유려한 음악, ‘노’의 기품있는 무대 양식과 극대화된 전통의상의 화려함까지 끌어 오면서 고급스런 오페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가부키의 대사는 사무라이와 그 집안 식구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은 내용으로 하는 ‘지다이모노(時代物)’와 상인이나 시민계층의 이야기를 담은 세와모노(世話物)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사무라이들의 충성과 인간적인 사랑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주된 줄거리인 이야기들이 어찌나 장황한지 긴 것은 하루 종일 걸리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와서 밥을 먹어가면서 관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티베트의 아체라모와도 흡사한 모습이라 세상 어디를 가나 연극과 노래와 춤을 즐기는 풍경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춤이나 판토마임을 반주하기도 하고, 배우가 연기 할 때 배경음악으로 연주되기도 한다. 이때 샤미센(三味線) 음악이 주된 역할을 하는데, 이는 분라쿠 대본을 노래하는 ‘조루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조루리 음악에 맞추어 분라쿠에서 인형이 하던 역할을 가부키에서는 배우들이 연기하고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이다.

 가부키 음악은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분라쿠의 조루리(이야기 음악)에서 유래한 기타유(姜太)부시(夫節), 에도지방의 인형극에서 온 도키와즈(常磐律)부시와 기요모토(淸元)부시, 무용할 때 연주되는 샤미센 반주에 의한 서정적인 성악곡인 나가우타(長唄), 나가우타 연주자와 몇 명의 타악기 연주자에 의해 연주되는 가게바야시(蔭囃子)가 그것이다.

 샤미센 연주자와 변사로 구성된 기타유부시는 주로 배우들이 대사를 하지 않을 때 연주하고, 도키와즈·기요모토·나가우타는 무용극의 반주음악이다. 그 중에 나가우타 연주는 하야시라는 합주단에 의해서 연주되는데 이는 ‘노’의 반주처럼 노칸(能管)이나 시노부에(篌笛)와 같은 관악기에 크고 작은 북(太鼓·大鼓·小鼓) 세 개가 추가된다.

 가부키음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나무 발을 쳐놓은 어두운 방에서 샤미센과 함께 하는 효과음이다. 이러한 것을 ‘게자온가쿠(下座音樂), 즉 무대 밖 음악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효과음악을 위해서 20여종에 이르는 타악기가 편성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악기인 ‘효시기(拍子木)’는 우리나라의 야경(夜警)꾼이 나무판을 쳐서 골목을 돌며 소리 내는 것과 닮았다. 효시기는 막이 오르기 전과 공연의 끝을 알리는 신호로 사용되는데 이런 것은 한국의 궁중음악에서 집박(執拍)이 치는 박(拍)의 역할과도 같다.

 가부키의 간주곡이나 전주곡은 연극의 분위기 조성에 필수적이다. 서양음악사에서 잊혀 질뻔한 마스네(1842~1912)가 오페라 타이스의 제 2막 1장과 2장 사이의 간주곡인 ‘타이스의 명상곡’으로 하여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듯이 가부키의 간주곡이나 전주곡 등 다수의 곡들 중에도 음악 그 자체만으로 독립돼 사랑받는 곡들이 많다.

 가부키에서 추는 춤이 일반 무용에도 영향을 미쳐 궁중 무용과 민속무용에 가부키 무용이 있을 정도이다. 언젠가 일본 무용 공연에서 ‘후지무스메(꽃소녀)’라는 무용을 본 적이 있다. 프로그램의 설명에는 겐로쿠(元祿)시대의 회화(繪畵)에서 빠져 나온 젊은 여인이 연인을 그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상이며 무용수의 분장을 볼 때 가부키적인 색깔이 물씬 풍겨서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맞다고 했다. 

 ‘후지무스메’의 무용수가 춤을 출 때 검은 옷과 모자를 쓴 보조 무용수가 간간이 무대로 나와서 복장이나 도구를 교체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 모습은 마치 분라쿠의 손과 발 역할을 하는 인형 조종사의 모습과 흡사해 예술 장르가 주고받는 영향이 서로 얽혀 있음을 실감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가부키의 관객은 노인들로 변해갔다. 노인들은 가부키를 구경하러 올 때 손자나 손녀를 데리고 오곤 했다. 아이들은 재미가 없지만 그 곳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가부키의 소리와 분위기를 익히며 성장하게 됐따. 결국 그들이 다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면, 어릴 적에 보았던 가부키 생각에 다시 그 곳을 찾는단다.

 사람들은 가부키의 줄거리를 이미 알기 때문에, 보는 둥 마는 둥하여 극에 몰두하지 않고 친구나 손님과 함께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극을 본다. 2층의 다다미방은 다른 방들과 격리돼 있어 그야말로 자유공간이다. 거기서 극을 보건 술을 마시고 지치면 그냥 누워 잘 수도 있다. 

 일체 침묵하며 무대만을 주시하는 서양의 극장과 달리 극을 보러온 사람들 대부분이 차를 마시거나 함께 온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므로 마치 친구를 사귀러 왔거나 소풍을 온 것과 같은 풍경은 한국이나 티베트,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다 아는 판소리 ‘춘향가’를 들으면서 줄거리를 궁금해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보다는 명창이 노래를 어떻게 하는지, 고수는 얼마나 장단을 잘 끌어가는지에 감상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가. 

 관객들은 무릎장단을 치며 노래에 추임새를 넣느라 광대 보다 더 신이 나 있다. ‘가부키’를 봐야 일본에 온 맛이 난다고 여긴 것일까? 요즈음은 1막 혹은 2막짜리 티켓으로 대강의 분위기만을 보고 가는 관광객도 많으니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세월의 힘을 이기는 장사는 없나보다. 

 작곡가·음악인류학 박사 http://cafe.daum.net/ysh3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