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당한 마녀들, 진짜는 20% 뿐이다?

기사등록 2010/12/11 08:31:00 최종수정 2017/01/11 12:57:58
【서울=뉴시스】양태자의 유럽야화<27>

 1782년에 ‘마녀’로 찍혀 희생된 여인 안나 괼디에 대해 한번 써본다. 1734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하녀로 일하면서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남아있는 공적 서류에 묘사된 안나 괼디는 뚱뚱하고 큰 체구에다가 검정 머리카락이라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은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애를 두 번이나 낳았다. 1765년 처음 낳은 애는 낳자 말자 죽어버렸다. 이 때문에 그녀는 영아 살해 죄로 몰려 망신스러운 표징과 함께 자택 구류를 당했다. 그러나 두 번째 아이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780년에 그녀는 의사·시의원·법관이면서 신교도인, 고향 도시에서 명망 있는 집안인 츄디가(家)에 하녀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 집의 8살짜리 딸 마리아와 언쟁을 한 뒤 마리아의 우유 잔에서 핀 여러 개가 발견됐다. 사람들은 괼디가 이 핀으로 마리아를 죽이려 했다고 몰아세웠다. 물론 그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사람들은 아예 믿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해고를 당한다.

 그런데, 그녀가 이 집에 해고를 당하고 나서 몇 주 뒤에 이 집 딸 마리아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피 묻은 가래와 함께 핀을 뱉어냈다. 마리아가 말하기를 “어떤 하녀가 내게 맛있는 과자를 줬는데 아마 거기에 이 핀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당장 괼디를 의심했다. 그녀가 이 집에서 쫓겨난 지 이미 3주가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멀리서 이상한 방법(?)을 써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며 마녀로 낙인 찍었다.

 사학자 바바라 벡 박사는 이렇게 죄를 뒤집어 씌워 그녀를 법정으로 몰아세우는데 집주인 츄디 박사가 가장 앞장을 섰다고 했다. 그 이유는 사실 그가 괼디와 부적절한 비밀 관계로 꼬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들통나게 되면  체면은 물론 직함에 치명타가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직책을 내놓아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계산은 오직 이런 일이 알려지기 전에 빨리 그녀를 죄인으로 몰아 세우는 것뿐이었다.

 괼디는 1782년 2월 체포돼 글라루스시(市)로 압송됐다. 이때 츄디 박사는 괼디가 시 당국에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신교 의회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이 신교 의회에는 그와 친한 많은 이들과 친척들이 책임을 맡고 있어 유리한 재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츄디 박사의 손아귀에 놓인 신교 의회에서 재판을 받게 됐으니 그녀의 생사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눈에 선하다.

 그녀는 혐의를 부인하지만 부인하면 할수록 혐의가 더 많이 덧씌워졌다. 괼디가 그 집에서 이미 나가고 없었던, 3주 뒤에 마리아가 다시 피를 토하며 구토하다가 자연적으로 나았다는 것은 마녀인 그녀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멀리서 마리아를 다시 살려낸것이라는 주장이었다.

 1782년 2월21일 붙잡혔던 그녀는 장기간의 심문과 야비하고 짐승 같은 고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강제 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심문관들이 이런 강제 자백을 받아내고 붙인 죄목은 ‘이상한 힘을 멀리서 조종하는 마녀’였다. 여기서 법관들은 다시 문제에 부딪히는데 ‘괼디를 장기수로 감옥에 넣느냐, 아니면 죽이느냐’였다. 왜냐하면 감옥에 보내게 되면 이 도시엔 감옥소가 없기에 대도시인 취리히로 보내져야 되기 때문이었다. 취리히로 보내게 되면 괼디측이 분명히 다시 재판을 걸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정당한 판결을 내린 것이 아니라 츄디 박사의 명성을 끼고 내린 판결이라는 것을 자신들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재판관은 1782년 6월18일 괼디를 참수형에 처한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단지 츄디 박사의 어린 딸이 아무 생각 없이 또 다시 지껄인 말 때문에  괼디의 남자친구였던 철물공 루돌프 슈타인뮬러도 체포된다. 이 남자는 자기는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자포자기했다고 벡 박사는 전한다. 어차피 이 법정은 진짜 범인을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자에게 걸려든 힘 없는 자가 희생당하는 곳이라는 것, 오직 영향력 있고 권력있는 자의 편에 서 있다는 것 등을 알아차린 그는 모든 희망을 저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나 괼디의 재판에서 보듯 당시의 민초들이 영향력 있고 권력을 쥔 이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게 인격 포장을 위해 용을 쓰던 츄디도, 철없던 소녀 마리아도, 힘있는 쪽에 붙어 흐리멍텅한 재판을 한 재판관들도 괼디 보다 다들 희로애락을 좀 더 길게 겪다가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보니 그들은 다 죽었지만 괼디는 아직 살아 있는 듯 하다. 200년도 훨씬 지난 뒤 그녀에 대한 영화가 상영됐다. 제목은 ‘안나 괼디-마지막 마녀’였다. 그녀가 죽은 지 225년이 되던 해인 2007 3월에는 ‘안나-괼디-재단’이 세워졌고, 이 재단은 안나 괼디를 기릴 뿐만 아니라 그녀처럼 사회의 귀퉁이에서 힘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돕고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안나-괼디-전시장’도 발족됐다고 한다. 1782년 내려졌던 안나 괼디에 억울한 판결이 오늘날 아직도 법률상 유효하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인권이 회복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특히 저널리스트이자 집필가인 발터 하우저 등은 안나 괼디의 인권 회복을 위해 개인적 투쟁을 할 정도라고 하니 후대인들의 이런 손길에 의해 그녀의 권리와 인권이 되살아났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 한마디 개인적으로 덧붙이고 싶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유럽 독일에서 안나 괼디만 마녀로 몰려 죽은 것이 아니라 무수한 다른 여인(약 80%)들이 마녀로 몰려 죽었다. 사회학자 베링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5만~6만명(학자마다 희생 숫자를 다르게 주장함)이 희생됐다. 안나 괼디는 그나마 후손들에 의해 사후 어느 정도 회복이 됐지만 지금까지 억울하게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심하면 바퀴에 매달린 채 숨져갔던 다른 억울한 영혼들은 어떡해야 하나? 만약 한국이었다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위해 진오기굿(씻김굿)이라도 열어 줄 수 있을 터인데…

 어쩌면 이 굿도 가능할 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나온 뉴스가 떠오른다. 유럽의 기독교문화에서 자란 한 독일 여인이 한국의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 김금화 만신에게서 신내림을 받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안드레아 칼프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무녀의 기질이 다분했다. 친 오빠의 죽음을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치유 능력까지 있었다고 한다. 유럽의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란 안드레아 칼프는 이런 문제에 대해 방황하다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세계 샤먼 대회에서 김금화 만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인생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금화 만신의 제자 무녀가 된 안드레아 칼프씨는 한국에서 전수 받은 굿을 독일에서도 열고 있다고 한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녀에게 구체적으로 한번 물어 보고 싶다. “당신 나라 독일에 지난 수세기 동안 마녀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있지 않는가? 한국의 무(巫)의 구조로 본다면 이들의 억울한 영혼들이 분명 아직도 구천에 떠돌고 있지 않겠는가? 당신이 무녀로서 그들의 영혼을 한번 달래 줄 수 없을까?”하고.

 비교종교학 박사 ytz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