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정병준 기자 = 현대·기아자동차의 독주체제가 이어지고 있는 국내 자동차 시장. 지난해 국내 시장 점유율 80%를 넘긴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렇다 할 적수가 없다보니 내수 시장에서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사촌지간인 현대차와 기아차가 지난해부터 동급의 경쟁 차종을 서로 출시하며 시키지도 않은 결투를 '알아서' 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1분기(1~3월) 판매량은 현대차가 내수에서 16만8030대를 판매해 전체(34만9663대) 의 48.1%를 독식했다. 기아차는 같은 기간 10만5231대(30.1%)를 판매, 선두 현대차의 뒤를 이어 국내 완성차 업체 중 두 번째로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현대·기아차의 올해 1분기 내수판매 점유율은 78.1%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81.2%(현대차 12만9358대(50.3%), 기아차 7만9406대(30.9%)) 보다 3.1% 점유율이 줄었지만 여전히 막강 권력을 자랑한다.
특이한 것은 현대차의 경우 점유율이 전년 동기 대비 2.2%나 줄어든 반면 기아차는 0.8%가 늘었다는 점이다. 아우(기아차)가 형(현대차)의 점유율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반면 경쟁사인 르노삼성차(11.6%)와 GM대우(7.6%), 쌍용차(1.9%)의 점유율은 큰 변동 없이 미미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 점유율 하락에 힘을 보태긴 했지만 이들 세 업체를 합쳐도 기아차를 넘지 못한다.
이는 경쟁사 대비 앞선 기술력과 막강한 영업망, 다양한 차종을 앞세워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의 독주를 막기에는 경쟁사의 제품이나 영업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업망만 해도 현대차는 현재 전국 지점과 대리점이 850여 곳이고, 기아차는 790여 곳에 달한다. 이에 반해 르노삼성은 192곳, GM대우는 300여 곳에 불과하다.
◇"그들만의 리그" 벌이는 현대·기아차
이처럼 경쟁상대의 '전투력'이 밑천을 드러낸 상황이다 보니 매번 사촌끼리 싸움을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기아차가 디자인 경영으로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며 성장의 발판을 다지기 시작한 지난해 이후 심화되고 있다.
특히 올해 기아차는 현대차의 동급 차종 판매량을 넘어서는 등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룹 내부에서 현대와 기아 출신이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모습을 닮았다.
지난해 11월 출시된 기아차의 첫 준대형 세단 'K7'은 올해 1~3월 총 1만3409대가 팔리며 1만2654대에 그친 현대차의 동급차종 그랜저를 넘어섰다. 신구(新舊) 대결이긴 하지만 동생이 형을 보기 좋게 따돌린 셈이다.
스포츠유틸리티(SUV)차량인 기아차 쏘렌토R(1만1419대) 역시 1~3월 판매에서 현대차 싼타페(1만627대)를 넘어섰다. 기아차 프라이드(3734대)도 동급 경쟁차종인 베르나(2413대)를 제쳤다. 기아차가 형님격인 현대차와 붙는 족족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출시된 신차끼리의 경쟁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23일 출시된 기아차의 소형 SUV 스포티지R은 출시 이후 계약대수가 5600대를 넘어섰다. 현대차 신형 투싼ix의 인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판매량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대차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현대차는 지난 1일 안전성과 상품성을 강화한 '2011년 투싼ix'를 출시한 데 이어 7일 싼타페와 베라크루즈의 2011년형 모델을 출시해 반격에 나섰다.
올 하반기에는 베르나와 아반떼 신형 모델을 출시하고, 연말에는 신형 그랜저를 출시해 '동생의 반란'을 제압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기아차는 오는 29일 로체 후속 중형 세단 'K5'를 출시한다. 최첨단 사양과 획기적인 디자인이 공개된 K5는 출시 전부터 예사롭지 않은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현대차 입장에서 K5는 양날의 칼과도 같은 존재다. 지난해 출시된 쏘나타가 올해 1~3월에 4만대가 넘게 팔리며 판매신장을 이끌고 있지만, K5가 출시되면 수요가 줄어들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K5가 쏘나타 대신 경쟁상대인 르노삼성차의 뉴SM5의 판매를 잠식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업계에서는 정 반대로 보고 있다. 뉴SM5의 경우 고객 충성도가 높은 차종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구형 SM5가 쏘나타를 제쳤던 기억을 더듬으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업계 관계자는 "르노삼성은 뉴SM5와 더불어 기존 SM5 역시 꾸준히 수요가 유지되고 있다"며 "SM5는 고객 충성도가 높은 편이라 경쟁차종 출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K5가 뉴SM5의 판매를 견제해줘야 하는데 (반대로) 쏘나타 수요를 잡아먹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며 근심어린 시선을 내비치기도 했다.
사실상 천적이 없는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피붙이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현대·기아차의 '혈투'가 국내 자동차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된다.
<사진설명>사진 위부터 현대차 그랜저와 기아차 K7, 현대차 쏘나타와 기아차 K5.(사진=현대·기아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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