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번영을 심다' 쓴 한글서예가 여태명 별세…향년 70세

기사등록 2026/10/16 17:14:22

민중의 생활글씨 '민체' 개척…한글 문자예술 확장

【익산=뉴시스】강명수 기자 = 4·27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기념식수 표지석  글을 쓴 여태명 선생이 27일 저녁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자신의 작업실에서 표지석 글씨 원본을 처음 공개했다. 2018.04.27. smister@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기념식수 표지석에 새겨진 '평화와 번영을 심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심은 소나무 앞에 놓인 이 글씨는 서예가 효봉(曉峰) 여태명의 작품이다.

평생 백성의 글씨를 연구해 온 그가 쓴 '민체(民體)'가 남북 평화의 역사적 현장에 새겨졌다.

한글서예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여태명 원광대학교 명예교수가 16일 별세했다. 향년 70세.

1956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전주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원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서예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고인의 대표적인 업적은 한글서예의 영역을 궁체 중심에서 민중의 생활글씨로 확장한 것이다.

옛 소설 필사본과 편지, 생활자료 등에 남은 글씨를 오랫동안 수집하고 연구했다. 정형화된 서체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삶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글씨를 '민체'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서울=뉴시스】고승민 기자 = 여태명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제3차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며 '남북을 잇다, 통일을 열다' 대형 붓글씨를 쓰고 있다. 2018.09.17.kkssmm99@newsis.com


고인은 민체를 단순한 옛 글씨의 복원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한글 자음과 모음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문자조형부터 서예와 회화, 전각, 캘리그래피, 디자인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전주 톨게이트의 '전주' 현판은 고인의 문자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전주로 들어오는 방향에서는 모음을 크게 써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자식의 모습을 표현했다. 반대로 전주를 떠나는 방향에서는 자음을 크게 해 자식의 성장과 성공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도립미술관 등 여러 공공 공간에도 고인의 글씨가 남아 있다.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 사용된 이른바 '효봉 개똥이체'로도 대중에게 친숙하다.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초대 및 제2대 회장을 맡아 서예를 방송과 출판, 상업디자인 등 생활문화 영역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은 고인의 글씨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순간이었다.

당시 청와대의 요청을 받고 여러 서체로 작성한 시안 가운데 평생 연구해 온 민체가 최종 채택됐다.

고인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현장에 자신의 글씨가 사용된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긴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제교류에도 힘썼다. 1989년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금석문과 탁본, 민간서체 자료를 연구했다. 1999년에는 중국 루쉰미술학원 객좌교수로 체류하며 중국미술을 연구했다.

전통적인 서예의 틀을 넘어 문자를 독립적인 조형언어로 발전시키는 작업도 지속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회화적 요소로 활용하고, 글씨와 그림의 근원이 하나라는 서화동원(書畫同源)의 정신을 현대 문자예술로 확장했다.

빈소는 서울성모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8일 오전 5시. 장지는 천안추모공원을 거쳐 전북 진안 백운 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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