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한미 삼청서 16일 개막…초기작부터 근작까지 130여 점
흑백 다큐멘터리에서 드로잉·설치·컬러 사진으로 확장
인간의 무의식과 불안 탐구…내년 2월 21일까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빗자루와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발밑에는 흰 토끼가 웅크리고, 뒤편 벽에서는 기괴한 얼굴들이 관객을 응시한다. 현실에서 마주칠 법한 인물과 동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놓인 공간은 어딘가 불길하고 낯설다.
사진일까, 그림일까.
미국 출신 사진작가 로저 발렌(Roger Ballen·76)의 2021년작 'Thrown Out'이다. 인물과 동물, 벽면의 드로잉이 뒤섞인 화면은 현실을 기록한 사진이라기보다 인간의 무의식을 무대로 옮긴 한 편의 기묘한 연극처럼 보인다.
인간 내면의 불안과 원초적 충동을 탐구해온 로저 발렌의 개인전 'Roger Ballen. The Works: Drawing meets Photography'가 오는 16일 서울 뮤지엄한미 삼청본관에서 개막한다.
1960년대 초기 흑백사진부터 최근 컬러 사진, 드로잉과 에칭 등 130여 점을 통해 60여 년에 걸친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다.
195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발렌은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인물과 사물, 동물, 드로잉을 결합하며 독자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발레네스크(Ballenesque)'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현실과 환상, 인간과 동물, 이성과 광기가 뒤섞인 기묘한 미학이다.
발렌은 자신의 작업을 "사진인 동시에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무엇이다.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사진은 단순히 눈앞의 현실을 포착하는 수단이 아니다. 인물과 사물을 배치하고 벽에 그림을 그리며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무대다.
이번 전시는 사진과 드로잉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렌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로 발전해온 과정을 7개 파트로 펼쳐 보인다.
초기 작품에서는 거리와 건축물, 인물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만날 수 있다. 매그넘포토스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폴 스트랜드 등의 사진을 접한 발렌은 일찍부터 빛과 구도, 선과 형태에 관심을 기울였다.
1980~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제작한 'Dorps'와 'Platteland' 연작에서는 마을과 건축물, 실내 공간과 인물을 촬영했다. 이후 'Outland' 연작부터 인물과 사물을 직접 배치하고 드로잉을 끌어들이며 현실의 기록과 연출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뚜렷해졌다. 'Shadow Chamber'와 'Boarding House' 연작에서는 인물과 사물뿐 아니라 배경의 선과 여백까지 치밀하게 조율했다. 사진은 현실을 담는 창에서 작가가 직접 만들어내는 무대로 바뀌었다.
'Theatre of Apparitions' 연작은 사진과 드로잉의 관계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발렌은 어둡게 처리한 유리 표면을 긁거나 지워 형상을 만든 뒤 이를 촬영했다. 긁힌 자국 사이로 빛이 스며들면서 얼굴과 유령 같은 형상들이 떠오른다. 사진은 드로잉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된다.
새와 쥐도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존재다. 'Asylum of the Birds'와 'Roger's Rats' 연작에서는 동물들이 인간과 함께 기묘한 공간을 구성한다. 이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인간과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공유하는 동반자로 등장한다.
오랫동안 흑백사진을 고수해온 발렌은 2020년 이후 컬러 사진으로도 작업을 확장했다. 'Spirits and Spaces' 연작에서는 선명한 색채가 인물과 동물, 드로잉과 충돌하며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발렌의 작품은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가 제안한 '아르 브뤼(Art Brut)'와도 맞닿아 있다. 제도화된 미술교육과 문화적 규범에서 벗어난 원초적인 표현을 뜻하는 개념이다.
치밀하게 연출된 장면 속에 등장하는 낯선 인물과 동물, 예측할 수 없는 형상들은 인간의 무의식과 광기, 사회의 주변부를 드러낸다. 우리가 낯설고 불편하게 여기는 존재들이 결국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질문을 던진다.
미술관 수장전시실에서는 폴라로이드 사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린 작품과 에칭도 선보인다. 사진과 회화, 드로잉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발렌의 실험을 살펴볼 수 있다.
지난 9월 영상 작업을 소개한 프리뷰 스크리닝에 이어 마련된 이번 본전시는 내년 2월 21일까지 열린다.
오는 17일 오후 6시에는 로저 발렌이 직접 참여하는 아티스트 토크도 진행된다. 작가는 짧은 퍼포먼스와 함께 작품의 제작 과정과 작업에 담긴 생각을 들려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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