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빛·소리·온도가 남긴 덩어리…하지훈 개인전 ‘풍경 이후’

기사등록 2026/10/07 08:44:49

이화익갤러리서 신작 22점 전시

색 걷어낸 신작 ‘Isle of Tempest’ 첫선

brilliant summer day, 130.3x193.9cm, acrylic, oil on canvas,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풍경은 사라졌다. 대신 기억이 남았다.

산도 섬도 바위도 아닌 듯한 거대한 덩어리가 화면 한가운데 떠오른다. 붉고 노란 색채가 폭발하듯 뒤엉키기도 하고, 검고 희뿌연 형체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분명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제 존재하는 장소는 아니다.

20여 년간 풍경을 그려온 하지훈 작가가 이번에는 풍경을 본 ‘이후’를 그렸다.

하지훈 개인전 ‘after landscape’가 7일 서울 종로구 이화익갤러리에서 개막한다. 2023년 ‘다층의 공기’ 이후 이화익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으로, 신작을 중심으로 회화 22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 ‘after landscape’는 말 그대로 ‘풍경 이후’다. 눈앞의 풍경이 사라진 뒤에도 몸 안에 남아 있는 기억과 감각을 회화로 끌어낸다.

하지훈에게 풍경은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재현하는 대상이 아니다.
Garden of Light #8, 105x150cm, acrylic, oil on canvas,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부산에서 태어나 대구와 독일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이주’는 작업의 중요한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잦은 이사를 경험하면서 특정 장소의 정확한 모습을 기억하기보다 그곳의 공기와 빛, 소리와 온도 같은 감각을 기억하게 됐다.

시간이 지나 실제 풍경이 흐릿해지면 감각의 파편만 남는다.

작가는 그것들을 다시 화면 위에서 조립한다. 캔버스에 등장하는 커다란 덩어리 역시 어느 산이나 바위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풍경을 경험한 뒤 남은 기억과 감정이 응축돼 만들어진 형상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구체적인 풍경과 추상 사이를 오간다. 가까이에서는 색과 붓질이 뒤엉킨 추상처럼 보이다가 한 걸음 물러서면 거대한 암석이나 섬, 산맥 같은 형상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변화가 더욱 뚜렷하다.

‘Garden of Light’ 연작에서는 강렬한 색채가 화면을 밀고 나온다. 붉은색과 주황색, 초록과 파랑이 겹치며 빛을 머금은 거대한 덩어리를 만든다. 화면 속 형상은 단단한 암석처럼 보이다가도 빛과 공기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흔들린다.

반면 새롭게 선보이는 ‘Isle of Tempest’ 연작은 색을 거의 걷어냈다.

검정과 회색을 중심으로 한 화면에서 형체는 어둠 속 섬처럼 떠오른다. 작가는 색채보다 공기의 밀도와 화면의 깊이에 집중했다. 겹겹이 쌓은 붓질과 명암은 특정 풍경을 설명하기보다 시간이 흐르며 축적된 기억의 흔적처럼 남는다.
Isle of Tempest#16, 70x70cm / Isle of Tempest#5, 73x73cm, acrylic, oil on canvas, 2026 Isle of Tempest#7, 73x73cm / Isle of Tempest#8, 73x73cm, acrylic, oil on canvas,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작업에는 하지훈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미술사의 풍경도 스며 있다.

독일 상징주의 화가 아놀드 뵈클린과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회화로 밀어붙인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다. 작가는 이들의 작품을 자신이 지속해온 ‘섬’에 대한 생각과 연결했다.

그러나 과거의 풍경을 인용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미술사 속 이미지 역시 자신의 기억을 통과하면서 또 다른 풍경으로 변한다.

결국 하지훈이 그리는 것은 장소라기보다 장소가 사람 안에 남는 방식에 가깝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바다는 눈부신 빛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축축한 공기나 소리로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흐려지고 실제 풍경과도 멀어진다.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하지훈 회화의 출발점이다.
Silent Enigma#7, 162x130cm, acrylic, oil on canvas,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작가는 관객에게도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화면 속 덩어리를 산으로 보든 섬으로 보든, 혹은 아무것도 아닌 색과 형태로 보든 상관없다. 관람객 각자의 기억과 경험이 그림과 만나는 순간 또 하나의 풍경이 만들어진다.

하지훈은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쿤스트아카데미 뮌스터에서 수학했다. 독일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제자인 미카엘 반 오펜에게 회화를 배웠으며 2014년 대구미술관 Y아티스트 프로젝트 작가로 선정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 대구미술관, 금호미술관, 영은미술관 등 국내외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는 27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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