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라슨, 첫 내한공연서 눈부신 해방구 "나는 예뻐요…가끔은 추해질 자유"

기사등록 2026/10/05 09:33:13

4일 명화라이브홀서 첫 단독 내한공연…5일까지 각 1600명 매진

90분간 춤·가창·끼 장악한 올라운더 디바

'코리안 자라 라슨'들과 완성한 런웨이

올해 내한 팝 공연 중 단연 백미

"삶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여도 괜찮아"

[뉴욕=AP/뉴시스] 자라 라슨(Zara Larsson)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팝 음악이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맹렬한 쾌락은, 무대 위의 화려한 피사체가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울을 깨부수고 온전한 실존의 주체로 도약할 때 발생한다. 스웨덴 출신의 글로벌 팝 디바 자라 라슨(29·Zara Larsson)이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명화라이브홀에서 펼친 첫 단독 내한공연 '미드나이트 선 투어 인 서울(Midnight Sun Tour in Seoul)'은 그 명제를 증명한 황홀한 90분이었다.

5일까지 양일간 각 해당 공연장 최대 수용치인 1600석을 일찌감치 매진시키며 성사된 이번 공연장은 시작 전부터 여느 팝 콘서트와는 공기의 결이 달랐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옷차림부터가 이미 하나의 눈부신 스펙터클이었다. 반짝이는 글리터 메이크업과 과감한 크롭톱, 핑크빛 네온 컬러와 Y2K 감성의 키치한 액세서리로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 이른바 '코리안 자라 라슨'들이 플로어를 빼곡히 채웠다.

여기에 공연 대기 도중 장내 스피커에서 그룹 '소녀시대'의 '지(Gee)', '씨스타'의 '터치 마이 바디(Touch My Body)', '레드벨벳'의 '빨간 맛', 그리고 싸이의 '강남스타일'까지 익숙한 K-팝 명곡들이 흘러나오자 객석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거대한 떼창과 춤, 웃음이 한데 터져 나왔다.

단순한 분위기 띄우기가 아니었다. 라슨은 일찍이 그룹 '방탄소년단'(BTS) 매니저 게임 OST 'A 브랜드 뉴 데이(A Brand New Day)' 가창을 비롯해 '트와이스'의 '모어 앤드 모어(MORE & MORE)', '소녀시대' 태연의 '멜트 어웨이(Melt Away)' 그리고 발매를 앞둔 그룹 '아이브(IVE)'의 새 앨범 '룩스 캔 킬(Looks Can Kill)' 수록곡 '글로우 모션(Glow Motion)' 작곡에 이르기까지 K-팝의 정교한 멜로디 라인을 함께 직조해 온 깊은 인연을 지녔다. K-팝 팬들에게 라슨은 바다 건너의 먼 스타가 아니라, 감각의 결을 공유해 온 가장 친밀한 음악 동료였다.

암전 후 여리여리한 실루엣으로 등장한 라슨은 최신 정규 앨범 타이틀곡 '미드나이트 선(Midnight Sun)'과 '블루 문(Blue Moon)'으로 단숨에 공간을 장악했다. 분홍빛 금발을 흩날리며 묵직한 베이스 비트 위에 몸을 실은 그는 첫 곡부터 흔들림 없는 고음을 뿜어냈다.

"오늘 밤, 여러분에게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면 난 당신이 그러기를 원해요." 라슨의 이 짧은 외침은 이날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적 선언이었다.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에너지, 외부의 잣대로는 결코 규정하거나 포획할 수 없는 내면의 힘을 무대와 객석이 함께 길어 올리자는 연대의 촉구였다.
[뉴욕=AP/뉴시스] 자라 라슨(Zara Larsson)
초반부의 백미는 단연 '프리티 어글리(Pretty Ugly)'였다. 핑크빛 조명 아래 선 라슨은 마이크를 잡고 객석을 향해 "난 정말 예뻐. 네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내 곁에 머물러 줘"라고 유도한 뒤, 밴드 멤버들과 함께 또렷한 한국어로 "나는 예뻐요!"를 외쳤다. 객석에서는 뭉클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라슨이 던진 진짜 화두는 그다음이었다. "늘 예뻐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해요. 가끔은 기꺼이 조금 추해질 필요도 있으니까요."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갇혀 '항상 완벽하게 아름다워야 한다'는 억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을 향해, 그는 기꺼이 '추해짐(get a little ugly)'을 선택할 수 있는 파괴적 자유를 역설했다. 자발적으로 매끄러운 껍데기를 벗어던질 때 비로소 진정한 해방이 찾아온다는 그의 메시지는, 팝이라는 대중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날카로운 인문학적 성찰이었다.

무대 위 라슨은 가창과 춤, 연주와 무대 장악력 어느 하나 빈틈이 없는 완벽한 '올라운더'였다. '와우(Wow)'와 '에인트 마이 폴트(Ain't My Fault)'에서는 고난도 다리 찢기와 격렬한 군무를 소화하면서도 음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폭발적 폐활량을 과시했다. 최근 피겨스케이팅 선수 알리사 리우의 갈라쇼 배경음악으로 쓰이며 빌보드 글로벌 200 차트 정상을 밟은 핑크팬서리스 협업곡 '스테이츠사이드(Stateside)' 리믹스 버전에서는 몽환적인 음색으로 객석을 홀렸다. 건반과 베이스, 드럼, 기타로 구성된 전원 여성 세션 밴드와 댄서들은 군더더기 없는 호흡으로 거대한 사운드의 벽을 쌓아 올리며 라슨의 보컬에 단단한 날개를 달아줬다.

공연 중반, 20대의 완숙미를 고백하는 순간은 한 편의 성장 서사였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데뷔해 서른 살을 목전에 둔 라슨은 자전적 성찰을 담은 곡 '새턴스 리턴(Saturn’s Return)'을 부르기 전 담담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뉴욕=AP/뉴시스] 자라 라슨(Zara Larsson)
"예전에는 모든 일이 당장, 빨리빨리 일어나기만을 바랐어요. 하지만 28세가 돼 이곳에 선 지금, 그저 지금이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여도 괜찮아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거죠." 조급했던 유년의 불안을 지나, 흘러가는 시간의 궤적을 온전히 긍정하는 성숙한 인간의 여유가 묻어났다.

이날 가장 뜨거웠던 극적 순간은 역주행 신화의 주인공 '러시 라이프(Lush Life)'에서 터져 나왔다. 라슨은 오프닝부터 모든 노랫말을 단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따라 부르던 필리핀 마닐라 출신의 관객 '지나'를 무대 위로 불러올렸다. 즉석에서 흰 티셔츠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코리아 포 자라(Korea for Zara)'를 새겨 선물한 뒤, "적어도 내가 노래는 잘하니까요"라며 서툰 그림 솜씨를 위트 있게 넘긴 그는 지나와 나란히 서서 챌린지 댄스를 완벽하게 맞춰 췄다.

스포트라이트를 관객에게 기꺼이 양보하며 '스타'와 '관객'이라는 견고한 위계를 지워버린 이 찰나는, 계산된 연출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라이브 무대만의 생생한 우연이자 환희였다.

스웨덴어로 전화를 끊을 때 건네는 다정한 입맞춤의 인사 '푸스(Puss)'를 관객들에게 띄운 라슨은 클린 밴딧 협업곡 '심포니(Symphony)'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라슨은 마지막 남은 에너지 한 방울까지 쏟아붓듯 공간 전체를 울리는 고음으로 화답했다.

90분 내내 이어진 열기 속에 10월 초가을의 서늘함은 자취를 감췄고, 명화라이브홀 안에는 오직 꺼지지 않는 백야의 태양과 뜨거운 여름만이 머물렀다. 노래를 잘하면서 동시에 춤까지 완벽하게 지배하는 진정한 디바의 위용. 올해 국내에서 펼쳐진 무수한 해외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힐, 완전무결한 카타르시스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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