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고른 대작 ‘백색 묘법’ 3점 한자리에…박서보미술관 개관

기사등록 2026/08/18 14:13:19 최종수정 2026/08/18 14:23:45

연희동에 3층 규모 ‘정원이 있는 미술관’

흐엉 도딘과 개관전 ‘비움 그 충만’ 2인전

젊은·여성작가 조명…“박서보 이후까지 이어가는 미술관”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박서보미술관에 공개한 박서보의 대작 3점. 거의 백색에 가까운 작품들로 마지막까지 그린 작품이다. 2026.08.18.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생전 박서보(1931~2023)는 자신의 미술관이 생기면 거대한 백색 ‘묘법’ 세 점을 걸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이 서울 연희동에서 현실이 됐다. 새로 문을 연 박서보미술관 3층 전시장에는 그가 직접 골랐던 대형 백색 ‘묘법’ 세 점이 벽을 떠나 나란히 서 있다. 미처 사인도 하지 못한 미완의 완성작이다. 사방에서 스며드는 자연광에 따라 한지의 골과 백색의 깊이가 시시각각 달라지며 압도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2023년 세상을 떠난 박서보가 끝내 보지 못한 자신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박서보미술관에 박서보의 생전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2026.08.18. pak7130@newsis.com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박서보 화백 영상이 박서보미술관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이끈 박서보는 생전 자신의 이름을 건 미술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고향인 경북 예천에서 추진된 미술관 건립은 중단됐고, 3년 전 제주에서는 박서보미술관 기공식까지 열렸지만 현재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제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의 첫 삽을 뜨며 환하게 웃었던 박서보는 2023년 10월14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그해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에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끝까지 작업을 이어갔던 그였다.

박서보미술관 외관 사진=박서보미술관 제공, 사진 남궁선 *재판매 및 DB 금지


18일 언론에 미리 공개된 박서보미술관은 그가 생전 생활하고 작업했던 연희동 작업실 바로 옆에 들어섰다.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약 2000㎡ 규모로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최문규 교수가 설계했다. 약 3년에 걸쳐 완공됐다. 공식 개관은 21일이다.

건물은 박서보의 작품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흰색과 회색을 중심으로 절제된 공간을 만들고 곳곳에 작은 정원을 들였다. 전시장마다 자연광과 정원이 스며들어 묵직한 건축에 숨통을 틔운다. 담백하지만 웅장하다. 작품과 자연, 건축이 한 공간에서 호흡한다.

특히 3층 높이 8m의 정사각형 공간 ‘큐브(cube)’가 압권이다. 반투명 유리를 통과한 자연광이 거대한 백색 묘법 세 점의 표면을 훑는다. 정면에서는 절제된 흰 화면이지만 옆으로 움직이면 한지의 골이 만든 깊이와 그림자가 살아난다.

박서보에게 흰색은 단순한 백색이 아니었다. 표백된 순백이 아니라 조선 백자의 회백색처럼 자연에서 온 색에 가까웠다. 짙은 회색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흰색 물감을 반복적으로 겹쳐 올렸다. 그래서 그의 백색에는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래 어둠이 있고, 그 위로 빛이 올라온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박서보미술관은 18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박서보미술관에서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서보와 베트남 출신 흐엉 도딘(Huong Dodinh) 작가의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6.08.18. pak7130@newsis.com


◆‘박서보만 보여주는 박서보미술관’ 아니다
미술관의 방향은 개관전부터 분명하다.

개관전은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박서보와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흐엉 도딘(Huong Dodinh·1945~)의 작품 42점을 선보인다. 박서보 25점, 호앙 도딘 17점이다. 전시는 내년 1월3일까지다.

두 사람의 그림은 색감부터 태도까지 묘하게 닮았다. 나란히 놓였는데도 좀처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흐엉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차례 겹쳐 쌓으며 빛이 화면 안에서 드러나는 회화를 구축해온 작가다. 두 사람의 재료와 방법은 다르다. 박서보가 물에 불린 한지 위에 선을 반복해서 긋고 밀어내며 화면을 비워갔다면 호앙 도딘은 안료를 거듭 쌓아 올린다.

한 사람은 선을 반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색을 쌓는다. 그러나 반복과 절제를 통해 화면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회화는 만난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박서보미술관은 18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박서보미술관에서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전시를 21일부터 펼친다. 2026.08.18. pak7130@newsis.com


두 작가의 인연은 박서보가 세상을 떠나기 약 3개월 전 시작됐다. 이전까지 서로의 작업을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은 언어도 문화적 배경도 달랐지만 작품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호앙 도딘은 박서보가 생전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가 됐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두 사람이 ‘비움’이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창작은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전시는 지하 2층 ‘SPACE Ø’에서 시작해 지상 2층 ‘SPACE 2’, 3층 ‘SPACE 3’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두 작가의 작품에서 출발해 박서보의 흑색·색채 한지묘법을 거쳐 마지막에는 두 작가의 백색 계열 작품이 만난다.

검정에서 색으로, 다시 백색으로 향하는 동선은 박서보 회화의 변화와 함께 ‘비움이 어떻게 충만이 되는가’를 공간적으로 보여준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박서보미술관은 18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박서보미술관에서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전시 전경. 2026.08.18. pak7130@newsis.com


◆젊은 작가 발굴·여성작가 조명…교육·연구자 지원
박서보미술관은 한 작가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에 머물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개관전에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흐엉 도딘을 선택한 것도 이 같은 방향과 맞닿아 있다. 유명 작가를 박서보와 병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작가, 특히 여성 작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문을 열겠다는 구상이다.

박서보가 생전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던 태도를 미술관 운영으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박승호 이사장은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며 박서보가 권위나 관행보다 가능성과 재능을 보고 새로운 작가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했던 정신을 강조했다.

미술관은 박서보의 작품과 자료를 연구·보존하는 한편 국내외 작가를 소개하고 교육·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박서보재단은 현재 작품 보존·관리와 아카이브 구축, 전시·출판 등을 진행하고 젊은 창작자와 연구자 지원사업도 펼치고 있다.

박 이사장은 “박서보가 돌아갔음에도 그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미술관의 방향을 설명했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박서보미술관 전시장 외부 유리 너머로 정원이 펼쳐져 있다. 자연광과 녹지가 전시장 안으로 스며들며 여유로운 관람 환경을 만든다.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정원이 있는 미술관…“아버지가 가장 좋아했을 공간”
그렇다면 박서보 자신이 살아 있었다면 새 미술관의 어느 곳에 가장 오래 머물렀을까.

박 이사장의 답은 작품 앞이 아니라 ‘정원’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박서보에게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는 일이었다. 작업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곳이 자연이었고, 그는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가 계셨어도 특별한 말씀은 안 하셨을 겁니다.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곳에 가서 한 10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계셨다면, 그게 아마 최고의 칭찬일 것 같아요.”

미술관 1층, 유리 너머로 나무와 풀들이 펼쳐진 공간을 바라보며 박 이사장이 말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여기 앉아 계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이 박서보미술관 1층 정원에 서 있다. 그는 자연에서 작업의 에너지를 다시 채웠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가 계셨다면 여기 앉아 계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매 및 DB 금지


한편 연희동 주택가에 자리한 미술관은 개관에 앞서 이웃 주민들을 초청해 바비큐 파티를 연다. 개관 첫날인 21일에는 호앙 도딘과 박승호 이사장이 참여하는 ‘전시 토크’를 개최한다.

9월부터 12월까지 박서보의 일기와 편지를 따라 자신의 문장을 써보는 ‘마음을 채우는 글쓰기’, 명상과 앰비언트 음악, 차와 그림을 함께 경험하는 ‘마음을 비우는 드로잉’ 등 연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입장료는 5000원.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박승호(왼쪽) 박서보재단 이사장과 이유진 이사.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박서보미술관에서 21일부터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개관전을 열고 본격적인 미술관 운영을 시작한다.  2026.08.18. pak7130@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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