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4일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이상은·김윤아·선우정아 등 약 30팀 출연
美 '릴리스 페어' 모티브…작가·코미디언 등도 나와
"얼마나 많은 걸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있었는가"
이 역설적인 선언 속에는 동시대 창작자들이 통과해 온 기울어진 운동장의 풍경과, 그 구조적 관성 속에서 누락됐던 목소리를 향한 치열한 윤리적 감각이 깃들어 있다. 오랫동안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은 각자의 고유하고 입체적인 세계를 맹렬히 구축해 왔음에도, 종종 '여신'이나 '마녀', 혹은 누군가의 '뮤즈'라는 납작한 수식어 안에 갇혀야 했다. 누군가의 예술적 성취가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특정한 섬세함이 주류 무대에서 밀려날 때, 우리는 그것을 개인의 무능력으로 치부하는 손쉬운 오류를 범해왔다.
그러나 고통과 소외의 근원을 개인에게서 찾지 않고 세계의 구조적 결함에서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정확한 통찰을 요구한다. 오지은이 1990년대 미국의 '릴리스 페어'를 현재의 한국으로 호명해 온 이유는 명확하다. 조건 없는 연대를 통해 괄호 속에 갇혀 있던 창작자들이 온전히 자신의 몫을 발화할 수 있는 영광과 기쁨의 영토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기획자가 불러낸 '영희'는 교과서 속에 박제된 과거의 이름이 아니다. 편견의 디폴트 값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한계와 투쟁하며 오늘을 창작해 내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존중의 대명사다. 이 연대의 장에 응답한 이름들은 그 자체로 동시대 창작자들의 눈부신 계보이자 살아있는 증명이다. 약 30팀이 뭉쳤다. 무대의 중심을 단단히 지켜온 선우정아, 이상은, 김윤아를 필두로, 이랑, 요조, 김사월, 나인(NINE9), 안신애 등 각자의 언어로 시대의 결을 감각해 온 음악가들이 기꺼이 한자리에 모인다. 또한 남메아리, 박소은, 안다영, 예람, 오소영, 우희준, 이설아, 이아립, 정새벽, 청우, 청요일, 해파를 비롯해 ddbb, 더 픽스(The FIX),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같은 밴드들과 수조, 윤새, 조소정, 선워스웨어(sunwashere) 등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아티스트들의 목소리가 다층적인 음악의 세계를 직조한다.
음악의 경계를 넘어 축제의 서사를 확장하는 이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이다혜, 김지승, 김소영, 최지은, 들개이빨 등 활자와 그림으로 세계를 해석해 온 작가들, 인디 생태계를 함께 고민하는 브로콜리너마저 잔디, 팟캐스트 공간을 개척한 셀럽 맷과 비혼세, 카메라 너머의 감각을 포착한 허가영 감독, 조형의 언어를 빚어내는 논센소 작가가 함께 연대한다. 여기에 정성은, 굉장한 여자들, 김서연, 원소윤, 최예나 등 무대 위에서 삶의 이면을 웃음으로 환기하는 코미디언들의 존재는 이 축제가 품은 서사가 얼마나 입체적인지를 보여준다. 타인의 상처를 응시하고 침묵했던 과거의 자신을 성찰하며 기꺼이 무대의 판을 짜는 행위는, 어쩌면 한 예술가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속죄일지도 모른다.
-라인업이 웬만한 대형 페스티벌 이상입니다. 개성 있는 뮤지션분들이 다 모인다는 게 관객 입장에서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느껴주시니 기쁩니다. 섭외를 위해 전화 통화를 정말 많이 했어요. 안다영 씨는 겨울 브레인스토밍 맨 처음부터 같이 해주기로 한 사람입니다. 김사월 씨, 안다영 씨와 음악적으로 가까우니까 '이런 거 하면 나올 생각 있어?' 물으니 당연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미 정해진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좋아하고 믿으니까 섭외했습니다. 이상은 선배님과 김윤아 선배님이랑 같은 시간대 공연을 안다영 씨, 안신애 씨에게 부탁했는데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말했어요. 이분들의 개성이라면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릴리스 페어(Lilith Fair)에서 영감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미국과 30년 정도 시차가 있는 지금 한국에서 이 축제가 열려야만 하는 이유부터 묻고 싶습니다.
-지은 씨 포함 김윤아, 이상은, 선우정아 씨 같은 분들은 이미 거물 아티스트인데, 여성 페스티벌이라고 구획 짓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그들을 가두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페스티벌은 빨리 없어져야 하는 페스티벌입니다. 이분들이 무대가 많아 굳이 이렇게 묶일 필요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묶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당사자여서 느끼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릴리스 페어가 열린 진짜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사라 맥라클란은 당시 앨범 '에인절(Angel)'로 빌보드 3위였고, 앨라니스 모리셋 앨범이 3000만 장 팔리는 등 가장 잘 나가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여자 뮤지션이 두 명 연속으로 나오면 너무 치우쳤다며 틀어주지 않았고, 그래미에선 각자 수상자들인데 굳이 합동 무대를 하라고 했답니다. 저도 예전에 합동 무대 제의를 많이 받았지만 보이콧했습니다. 오아시스와 블러가 같은 무대에 서려면 곡을 새로 쓰고 6개월을 조율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 여성 아티스트들이 온전히 40분간 자기의 극한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모자라다고 생각할까요. 코첼라에서 버니 샌더스가 대선 직전 유세 무대에 나와 중요 무대에 서는 클레어로(Clairo)를 소개하는 걸 보며 한국은 한참 늦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레어로가 한국에서 음악을 시작했다면 축제 주변 무대에만 세워졌을 겁니다. 영희 페스티벌은 다른 스탠더드를 가질 필요 없이 온전히 자신을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없어지기 위해 여는 페스티벌입니다."
-전주로 터전을 옮기시며 느끼셨을 장소성과 지리적 맥락이 홍대 마포 신과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요. 팟캐스트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에서 필라테스로 도시 발전 척도를 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대목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요즘 페스티벌 티켓값이 비싸졌고 인스타그램 과시용으로 변모했는데 가격이 무척 합리적입니다.
"이번에 오시는 분들이 도서전이나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가고, 설거지할 때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를 듣고, 유튜브에서 원소윤 씨의 코미디를 보는 분들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과시는 푸른 잔디밭의 와인잔이 아니라 책의 초판을 가지시는 겁니다. 첫 해 가격은 무조건 합리적으로 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폰서도 무대 미술도 없지만 출연진분들이 아주 적은 개런티로 와주셨습니다. '편견 때문에 오지은 음악 안 듣다가 5년, 10년 뒤에 우연히 듣고 계속 듣는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뻐서 음악 못할 거란 편견은 회사에 예쁜 직원이 입사했다고 일 못할 거 같다고 히는 것과 같은 무례함입니다. 홍대 여신 시대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있다가 해당 이슈가 30년 뒤 박사 연구 과제로 쓰이는 게 싫었습니다. 스트립이 마녀 역할만 세 번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저희 스스로 기획해서 발화해야 했어요. 다들 배가 고팠는데, 제가 '밥 먹고 할까?' 한마디 하니 우르르 밥 먹으러 가는 겁니다. 아직 똠양꿍을 안 먹어봤지만 이미 태국 요리를 좋아할 준비가 된 관객들에게 한 입 먹여주는 기회입니다. 김밥이 미국 냉동식품으로 큰 인기를 끌 때 교포들이 억울함을 토로했던 것처럼, 이제 마음을 열면 됩니다. 매진을 시켜주신 관객들 덕분에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맛집이라며 관심을 열게 할 겁니다."
-여성을 미녀, 마녀뿐 아니라 '뮤즈'라는 단어에 가두는 것 자체가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년 데뷔 20주년을 앞두고 새 음반 등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됩니다. 책도 쓰시고 음악도 병행하시는데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글 쓰는 세계로 피신을 갔었는데 호랑이 피하려다 범 맞은 격으로 흰 벽에 머리 찧는 기분이었습니다. 음악을 다시 해야지 생각하면 1초 만에 죽고 싶다는 전구가 깜빡였습니다. 전주에서 1년 정도 심리 상담 치료를 받고 해결했습니다. 무대보다 합주할 때 연주자들이 너무 멋있어서 고생도 아니고 정말 행복해요. 오히려 음악 하면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감내들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이상한 말도 대범하고 이성적으로 넘겨야 멋있는 여자가 됐고,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조용히 화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무마해야 했습니다. 불만을 제기하면 '너는 앨범도 많이 팔고 단공도 하고 우리 중에 제일 잘 되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과거 '홍대 여신'들에 대한 편견 속에서 제가 마녀라고 올려치기 당할 때, '여자치고 철야도 하고 일을 논리적으로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만히 침묵했던 것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영희 페스티벌은 제 속죄의 시간입니다. 요시나가 후미 작가님처럼 오타쿠 온리전을 여는 마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있었는지 그 다양성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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