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원조 재개 조건으로 의료정보·광물 접근 요구
잠비아·가나·짐바브웨 반발…일부 국가는 협정 체결
보건 지원과 외교 연계 강화…"생명 구호 정치화" 비판
31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이 에이즈(AIDS),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보건 지원의 대가로 의료 데이터 접근권과 핵심 광물 확보 등을 요구하면서 일부 국가들은 원조 협상을 거부하거나 지연시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수십 년간 유지돼 온 미국의 개발원조 체계를 사실상 폐기하고, 보건 지원을 미국의 외교·안보·경제적 이익과 직접 연계하는 새로운 양자 협정 방식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20여 개국은 미국과 협정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현재 에볼라 확산의 진원지인 콩고민주공화국과 체결한 9억 달러 규모의 5년 지원 계약도 포함된다. 이 계약은 콩고민주공화국이 미국과 광물 협정을 체결한 지 수개월 만에 성사됐다.
반면 짐바브웨, 가나, 잠비아 등은 미국이 제시한 조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잠비아는 미국이 제안한 20억 달러 규모 지원 패키지와 관련해 핵심 광물 거래, 미국 기업에 대한 우대 조치, 민감한 의료 데이터 제공 요구가 수용 불가능하다며 협상에 제동을 걸었다.
물람보 하임베 잠비아 외무장관은 "미국이 자국민을 보호하듯 잠비아도 자국민의 이익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양국 갈등은 마이클 곤잘레스 전 잠비아 주재 미국 대사가 퇴임 연설에서 잠비아 정부의 부패를 공개 비판하면서 더욱 격화됐다. 그는 잠비아 관리들이 미국의 의료 지원에 의존하면서도 정부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의회에서도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구리 자원 접근권을 대가로 HIV 치료 지원을 압박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원조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협정 세부 내용을 대부분 비공개로 유지하고 있다. 이에 워싱턴의 시민단체 퍼블릭 시티즌(Public Citizen)은 국무부를 상대로 정보 공개 소송을 제기했으며,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케냐에서도 국회의원과 시민단체들이 협상 과정의 불투명성을 문제 삼아 법적 대응에 나섰다. 미국의 보건정책 연구기관 KFF에 따르면 케냐는 16억 달러의 미국 지원을 받는 대신 자체적으로 8억5000만 달러를 부담해야 하는 조건을 제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KFF는 현재까지 전 세계 32개국이 미국과 새로운 보건 지원 협정을 체결했으며, 이에 따라 향후 5년간 약 130억 달러의 미국 자금이 지원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해당 국가들이 지난 5년간 받았던 지원 규모보다 약 3분의 1 적은 수준이다.
또 수혜국들은 미국 지원금 외에도 총 75억 달러 규모의 자체 재원을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수혜국도 보건 사업 비용을 함께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이를 통해 자국 납세자 부담을 줄이고, 수혜국의 장기적인 자립을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기존 국제 보건 지원 모델은 사실상 무기한 보조금 체제였다"며 "새로운 협정은 각국이 자체 자원을 투입해 의료 시스템에 책임을 지고 미국에 대한 장기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설명했다.
아프리카 보건 전문가들은 미국이 요구하는 의료·검체 데이터 제공이 향후 백신과 치료제 확보 과정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반면 일부 국가는 이번 협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간다 보건부 고위 관리인 다이애나 아트윈은 "새로운 협정 체계가 수혜국 정부의 예산 집행과 인력 운영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lje@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