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 84.7% "현장 규제가 연구 몰입 방해"…예산 집행·정산 단계 고충 가장 커
세탁기부터 AI 구독까지 행정 병목…정부, 法 개정 불필요한 R&D 규제 신속 개선
15일 중앙대학교에서 진행된 ‘R&D 규제 합리화를 위한 연구자 간담회’에서는 이처럼 연구자들이 실제 연구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애로사항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연구자들이 R&D에만 매진하기도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길고 복잡한 행정 절차나 규제 등으로 인해 역량이 깎이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지난 2~3월 정부 R&D 참여 경험이 있는 연구자 1148명을 대상으로 R&D 현장규제 합리화를 위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84.7%가 연구전념에 방해되는 규제가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R&D 수행단계 가운데 예산 집행·정산 단계에서 연구 전념에 방해되는 규제가 많다고 답했다. 이외에도 기획·선정평가 단계, 협약단계, 과제관리 단계, 최종평가 및 사후관리 단계 등 R&D를 진행하는 주기 전반에 걸쳐 불필요한 과제가 많다는 지적이 나왔다.
◆'영수증 지옥'에 빠진 생성형 AI 활용 연구…정산 규정이 발목
간담회에 참석한 연구자들은 특히 현대화된 연구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직된 예산 규정을 집중 성토했다. 윤기민 ETRI 선임연구원은 AI 연구를 위한 소프트웨어 구독 시 협약 기간에 묶여 연간 결제를 하지 못하고 비싼 월간 결제를 고수해야 하는 상황을 언급했다. 이로 인해 한 달에 수십 건, 연간 100건이 넘는 영수증을 일일이 증빙해야 하는 행정 낭비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예산 절감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연구자의 시간을 행정 업무에 과도하게 할애하게 만든다고 보고 있다. 실제 과기정통부 설문조사에서도 연구자들은 회의비 등 소액 지출 시에도 회의록과 사진 등 다중 증빙을 요구하는 문화를 주요 걸림돌로 꼽았다.
최무림 서울대 의대 교수는 "1년 차 연구 기간이 불과 3개월임에도 기계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시스템은 부조리하다"며 연구자의 사기를 꺾는 행정 편의주의를 비판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시스템의 정착이 시급하다는 제언도 이어졌다.
연구자의 이동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제도적 허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다흰 중앙대 교수는 “이관 협약 변경 관련 서류화가 제대로 안 되어있어 이직 시 기존에 쓰던 연구장비도 제대로 가져올 수가 없는 실정”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특히 정 교수는 연구비로 구매한 GPU 장비 등을 이전 학교에 두고 와야 하는 상황이 연구의 연속성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재민 중앙대 교수는 국가연구자정보시스템(IRIS)과 대학 내부 행정망이 연동되지 않아 발생하는 중복 입력 문제를 언급하며 시스템 고도화를 촉구했다. 임상이나 의료기기 인허가 과정에서의 과도한 규제 역시 과학자들의 도전적인 시도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언급됐다.
정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제도 개선에 나설 계획이다. 구혁채 과기정통부 1차관은 "10년 전과 비교해 기초연구 예산이 3배 이상 늘어난 만큼, 이제는 양보다 질적 개선에 집중해야 할 때"라며 규제 합리화 의지를 피력했다.
과기정통부는 생성형 AI나 소프트웨어 구독 서비스의 연간 결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르면 내달 관련 매뉴얼을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장기 계약이 저렴하다는 점을 소명하면 협약 기간을 넘기더라도 인정해주고, 그 절차도 간소화한다는 목표다. IRIS 시스템 연동성과 연구 자산 이관 가이드라인 마련 등도 속도감 있게 추진한다.
이외에도 법령이나 고시 개정이 불필요한 R&D 규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현장에 적용해나가기로 했다.
구 차관은 “내년이면 우리나라가 R&D 과학기술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이제는 제도, 실제 연구력, 연구원 수 등 지표에서도 우리나라가 더 잘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며 “R&D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도전·혁신 등을 많이 얘기하는데, 이를 자유롭게 하려면 규제에서 벗어나 좀더 편하게 연구를 하실 수 있도록 저희도 많이 지원해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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