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의 신작 소설집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사과와 변명 사이…'의도'라는 말 뒤에 숨은 시대
"타인의 자리에 앉아보는 것, 그것이 인간성"
[서울=뉴시스] 조기용 기자 = 소설가 손원평(46)은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가 타인에게는 상처와 고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괜찮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우리는 종종 자신도 모르게 선을 넘는다.
최근 펴낸 소설집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창비)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작품은 사회 속 관계들이 어떻게 얽히고, 그 안에서 의도치 않은 상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손원평은 9일 뉴시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번 소설집을 두고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엮여 있는지, 나의 행위와 말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헤집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첫 수록작 '당신의 손끝'은 상류층이 다니는 문화센터에 출강하는 미술강사 효원과 수강생 주영의 관계를 다룬다. 폐강 위기의 수업을 주영이 모두 신청하며 효원에게는 충성 고객 같은 존재가 된다.
효원은 그를 신뢰한 끝에 무리해서 개인 화실까지 마련한다. 상가 주인 노인은 월세가 유일한 수입이라며 계약을 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고, 효원 역시 관계가 계속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결국 관계는 끊어지고, 효원은 의도치 않게 노인과의 약속을 저버리게 된다. 효원과 주영의 관계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계약과 소비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셈이다.
손원평은 이를 두고 "끌어안고 어깨동무하는 관계가 아니라 손끝만 잡고 있는 관계, 언제든 손을 놓는 순간 완전한 타인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성격을 띤다"며 "각자의 역할에 맞게, 계약에 맞게, 특별히 문제 될 것 없이 살아가더라도 타인에게 상처를 내고 상흔을 남기게 된다"고 했다.
책 제목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는 사과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방어적 변명처럼도 들린다. 피해를 끼쳤지만 그 책임의 원인과 경계가 불분명할 때, 사람들은 종종 이 문장 뒤로 숨는다.
손원평은 제목에 대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에게 뒤집어씌운 일들을 함축하는 문장"이라고 말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때로는 면죄부처럼 쓰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관계의 균열과 구조적 문제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민낯은 우리가 후기 자본주의를 살고 있다는 것이고, 인간성이나 진실한 관계보다는 돈을 떠난 관계가 적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어요."
이 같은 문제의식은 그의 대표작 '아몬드'에도 닿아 있다. 손원평은 작품 속에서 주인공 윤재가 심박사에게 "친해진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는 "'아몬드'에서 심박사는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돈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며 "지금 사회는 그런 의미의 진실한 '친하다'는 관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이 각박해서라기보다 각자도생해야 하고, 자본주의 안에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타인과의 비교 심리도 더욱 부추긴다. 손원평은 소설집 수록작 '모자이크'를 통해 SNS가 만들어낸 전시와 비교의 구조를 포착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타인의 삶을 모방하거나 편집된 모습만을 내보이고, 기대와 다른 상대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큰 실망에 빠진다.
손원평은 "예쁘고 건강하고 괜찮은 모습을 타인에게 비추고 싶은 것은 본능"이라면서도 "SNS는 타인의 삶을 낱낱이 들여다보게 만들었고, 전시와 비교의 장이 됐다"고 짚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화실, SNS, 호텔, 재해 등 서로 다른 공간과 상황을 배경으로 한 10편의 단편이 실렸다. 손원평은 "우리가 아는 세계와 익숙한 풍경을 다른 각도와 색감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지평을 넓히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빠른 성장 속에서 한국 사회가 놓친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도 드러냈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자신의 의도가 상대에게도 제대로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난해진 것 같아요. 멈춰서서 들여다보는 일을 경시하고 다름을 쉽게 배척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마모되는 것은 어쩔 수 없죠. 그러나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어보는 것에서 개인들이 회복해야 우리 사회도 점차 건강해질 거라고 봅니다."
손원평은"타인의 자리에 앉아보고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성"이라며 "좋은 문학과 예술은 잠든 영혼을 깨운다"고 말했다. '의도'라는 말 뒤에 숨기 쉬운 시대지만, 그 말을 다시 들여다보는 순간 관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앞으로도 그의 작품 세계를 이끌 전망이다.
"두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냉전시대 후 세계가 암묵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참아내기에는 꽤나 긴' 평화를 유지해 왔는데요. 점점 이 세계가 임계점이 도달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언젠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기는 한데, 그 이전에 평화를 바라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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