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하얀 벽 한가운데, 조금 서툴러 보이는 풍경 하나가 걸려 있다. 나무는 삐뚤고, 길은 정확하지 않다. 색은 과감하고, 붓질은 망설임 없이 지나간다. 빠른 속도의 붓질이 대상을 감싸 쥔 채 화면을 밀고 나간다. 여과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 작가적 충동과 긴장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눈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묘하게 끌린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이스랏아트룸은 2일부터 2월 7일까지 유현경 개인전 ‘Erased, Emerged : 지워지고, 떠오르는’을 연다.
이번 전시는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밀도 있는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의 흐름을 잇는 자리다. 유현경은 마치 그리다 만 듯한 화면을 통해 회화의 속성에 정면으로 다가간다. 사람과 집, 풍경 같은 구체적 대상을 출발점으로 삼되, 그 위에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추상적인 감정과 생각을 겹쳐 올린다.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유현경은 2005년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개인전과 주요 그룹전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으며, 해외 주요 전시와 아트페어에서도 주목을 받아왔다. 2019년 제8회 종근당 예술지상을 수상했고, 2022년에는 ‘포브스코리아 2030 파워 리더 20인’에 선정됐다.
유현경의 회화는 숲과 들판, 길과 다리 같은 익숙한 풍경에서 출발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를 지나던 순간의 감각이다. 이동 중이었는지, 잠시 멈췄는지, 기억이 선명했는지 이미 흐려졌는지-그 경계에서 화면은 만들어진다.
작가는 그리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다시 그린다. 그래서 풍경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명확한 장면 대신, 사라진 것과 남은 것 사이에서 미묘하게 떨리는 공기만이 남는다.
전시 제목처럼, 이 그림들은 지워졌다가, 다시 떠오른다.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는 관람자의 기억을 불러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길, 이미 지나온 시간, 혹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잔상이다.
이스랏아트룸은 이번 전시를 통해 유현경의 풍경회화를 ‘장소의 재현’이 아니라 감정과 사유가 잠시 머무는 회화적 공간으로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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