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속 천주교인 안식처
한국 최초 신학교 탄생지
복자 9위 등 '순교자 본향'
[진천=뉴시스] 서주영 기자 = 2026년은 병오(丙午)년이다. 육십간지 중 43번째에 속하고 붉은색의 '병'과 말 '오'를 가리켜 붉은 말의 해라고도 부른다.
병오년에는 1496년 병오사화, 1846년 병오박해, 1906년 병오의병 등의 일이 있었다.
이 중 병오박해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4대 박해 중 하나로 기록된 사건이다.
1846년 조선인 최초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외국 선교사를 위한 해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조선 정부에 붙잡혀 천주교인 8명과 함께 문초와 형벌 끝에 순교했다.
이 외에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등 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 정부의 박해로 인해 산골짜기 등 안전한 곳에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해 지내기 시작했다.
이 중 대표적인 장소가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번지에 위치한 '배티성지(충북 기념문화제 150호)'다.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이다. 이 고개 주변에 돌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지 않던 오지인 데다 충청좌도, 우도, 경기도 접경에 자리 잡고 있어 숨어 살기에 적당했다.
차기진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시기는 신유박해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됐고 1837년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가 이곳을 공소로 지정했다"고 설명했다.
배티 신자들은 기해박해, 병오박해 기간 철저히 신분을 숨기며 지냈다. 덕분에 박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러한 소문에 신자들이 더욱 모여들었다.
교우촌이 커지면서 1850년 성 다블뤼(안 안토니오) 신부가 이곳의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해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한 뒤 운영했다. 이는 가톨릭 대학의 효시인 한국 최초 신학교의 탄생이다.
1853년부터는 최양업 신부가 뒤를 이어 신학교 지도를 맡았으며, 학교는 이듬해 신학생 3명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 보낸 후 문을 닫았다.
차 명예소장은 "신학교는 제천의 배론 교우촌에 새로 설립됐으나 최 신부는 이후에도 한동안 이곳에서 사목했다"고 전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배티 교우촌과 인근 교우촌에서는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했다.
순교자들의 묘는 지역 신자들에 의해 보살펴지다가 1976년 진천 본당의 6대 주임으로 부임한 장봉훈(3대 청주교구장) 신부가 이 교우촌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개발이 시작됐다.
2011년에는 배티성지가 충북도 지정 문화재 150호로 지정됐고 이듬해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이 지어졌다.
한국 천주교회가 100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배티성지는 교인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최초의 신학교 탄생지이자 최 신부의 사목 활동의 거점이었다.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인 최 신부는 일평생을 배티성지 외에도 전국 교우촌을 순방하며 신자를 돌보는 데 힘쓰다가 만 40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배티성지 담임신부인 최문석 신부는 "이곳을 성지로 개발한 이유 중 하나는 최 신부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며 "그분의 헌신 덕분에 박해 시기에도 전국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배티성지는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성지와 인근에는 28기의 순교자 묘소가 있으며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만 34명이다. 이 중 8명과 최 신부의 모친 이성례 9명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성지에서는 이들 9명(복자9위)의 시성과 최 신부의 시복을 위한 기도와 현양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최문석 신부는 "신앙을 위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공동체를 이룬 자들의 숨결이 서린 곳"이라며 "이곳은 개인적이고 물질화된 현대 사회에서 정말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줄 수 있는 장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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