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장 대신 가상 공간이 개발의 출발점
실차 없이도 달리는 디지털 트윈 시뮬레이터
하루 30개 사양 검증하는 개발 압축 효과
분당 10만 조합 분석하는 AI 배합 기술
불량률을 제로에 가깝게 낮춘 제조 예측
실물은 최종 확인, 판단은 모두 가상에서
화면 속 가상의 차량은 고속 코너를 반복해 돌고 있었고, 계기판에는 가속도와 하중 변화가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다만 이 차량에 장착된 타이어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품이었다.
한국타이어의 디지털 트윈 기반 타이어 시뮬레이터는 개발 과정의 상당 부분을 '가상 주행'에서 끝낸다. 차량과 타이어를 각각 디지털 모델로 구현해 컴퓨터 안에 올려놓고, 실제 도로 주행과 동일한 조건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연구원은 "차종과 관계없이 차량 제원과 특성을 입력하면 즉시 디지털 모델이 생성된다"며 "타이어 역시 스펙만 바꾸면 다른 사양을 바로 평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시험장에서는 타이어를 교체하고 차량을 세팅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반면 시뮬레이터에서는 파일 하나만 바꾸면 곧바로 다음 타이어 사양을 시험할 수 있다.
◆가상으로 하루 타이어 30개 평가
한국테크노돔에서 하루에 평가 가능한 타이어 사양만 20~30개에 이른다. 과거에는 한 달에 몇 개를 검증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상현실과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술을 통해 하루 단위로 설계 방향을 압축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의 개입 시점'이다. 디지털 트윈은 컴퓨터 안에서 자동 시뮬레이션만으로도 충분히 구동된다. 다만 한국타이어는 최종 단계에 반드시 운전자를 앉힌다.
한국타이어 선행연구 소속 연구원은 "타이어 성능에는 수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성 평가가 여전히 중요하다"며 "핸들을 돌릴 때 반응이나 미끄러질 때 차체 거동은 사람이 직접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술이 없었던 과거에는 타이어 감성 평가를 위해 실제 시험장으로 나가 눈길·빙판·젖은 노면을 찾아야 했다. 이제는 디지털 트윈 기반 시뮬레이터에서 상당 부분을 대체할 수 있다.
같은 조향 입력에도 타이어 스펙에 따라 가속도와 차체 반응이 달라지고, 그 차이를 운전자가 즉각 체감한다.
주행이 끝나면 모든 데이터는 저장돼 이후 분석과 설계 개선에 활용된다. 운전자가 느낀 감성과 수치 데이터가 동시에 남는 구조다.
◆AI 기술로 양산 전 가상 타이어 제작
타이어 모델을 만드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기존에는 시험기에서 측정한 실물 데이터를 바탕으로 디지털 모델을 구축했다. 현재는 실제 타이어를 만들기 전 단계에서도 AI가 생성한 가상 데이터를 활용해 모델을 만든다.
한국타이어 관계자는 "설계 인자가 수천, 수만 가지로 늘어나는데 AI를 활용하면 모든 조합에 대해 디지털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며 "설계 초기 단계에서 실패 가능성이 높은 조합을 대거 걸러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의 핵심 축은 AI 기반 버추얼 컴파운드 디자인(VCD)과 가상 제조 시스템(VMS)이다. VCD는 타이어 핵심 소재인 컴파운드 배합을 대상으로 AI가 분당 약 10만건의 조합을 자동 비교·분석해 최적안을 도출한다.
기존에는 하나의 컴파운드를 개발하고 검증하는 데 최소 6개월, 길게는 3년이 걸렸지만, VCD 도입 이후 개발 기간은 최대 50%까지 단축됐다.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물리적 실험 횟수 자체가 크게 줄었다는 설명이다.
VMS는 설계된 타이어를 실제 생산하기 전에 제조 적합성을 미리 판단한다. 실제 공정 데이터와 유한요소 해석 결과를 AI로 학습해 부적합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예측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대전 공장의 경우 불량률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과거에는 만들어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던 문제를 이제는 설계 단계에서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시뮬레이터에는 해외 시험장에서 수집한 데이터도 그대로 반영된다. 핀란드 설원이나 뉴질랜드 시험장에서 측정한 노면·기후·차량 거동 데이터가 디지털 트윈으로 환원돼 국내에서 반복 검증된다.
현장 관계자는 "해외에서 한 번밖에 하지 못하던 시험을 국내에서 수십 번 다시 돌려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시험 일정과 비용 부담이 동시에 줄어든 셈이다.
◆AI가 타이어 개발 구조 바꿔
디지털 트윈 전략은 한국타이어의 개발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설계→시제품→시험→수정으로 이어지던 직선형 개발 방식 대신, 가상 환경에서 수십 차례 검증을 거친 뒤 실물로 넘어가는 구조가 정착됐다.
실차 시험은 개발의 출발점이 아니라 최종 확인 단계로 자리 잡았다. 엔지니어의 역할 역시 ‘시험 수행자’에서 ‘설계 판단자’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는 조현범 회장 체제에서 본격화된 디지털 전환 전략의 연장선이다. AI와 디지털 트윈을 보조 수단이 아닌 연구개발의 기본 인프라로 삼겠다는 방향이다. 시뮬레이터 역시 시연용 장비가 아니라 실제 개발 일정과 의사결정에 직접 반영되고 있다.
한국타이어 관계자는 "이제 타이어의 경쟁력은 시험장을 얼마나 많이 보유했느냐가 아니라, 가상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먼저 검증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한국타이어 시뮬레이터는 그 변화를 가장 현장감 있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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