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보안국 등 심문 받고 징역 살이
전선 재투입 뒤 실종되거나 허드렛일
동료들은 왜 자폭하지 않았나 추궁
"차라리 우크라에 남아 시민이 되길"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포로가 됐다가 풀려난 러시아 병사들이 러시아에서 박해를 당하거나 다시 전선에 투입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연초 우크라이나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한 러시아 병사가 가족에게 전화해 몇 주 뒤 아들 생일에 맞춰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집에 가지 못했다.
스스로 애국적이라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몇 주 동안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서 심문을 받은 끝에 다시 전선에 투입됐다가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인근 전선에서 행방불명이 됐다.
가족들은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우려한다. 한 가족은 이 상황을 지옥의 고리에 갇힌 것이라고 표현했다.
러시아는 참전 용사들이 애국적이라며 찬양해왔다. 전선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들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장면이 수시로 TV에 등장한다. 이들에게는 특권을 누리는 러시아 지방 정부 직책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포로들의 운명은 정반대다.
러시아 군 지휘관들은 전선에 투입되는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폭하라고 지시한다.
허스키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래퍼, 드미크리 쿠즈네초프는 최신 앨범에 오른 노래에서 왼손에는 수류탄, 오른손에도 수류탄을 쥐고 나는 포로로 잡히지 않겠다고 강조한다.
귀향한 전쟁포로들과 가족들에게 기쁨을 누릴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항복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고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대접을 받는다.
이들에게 약속된 급여와 보너스는 포로로 잡히는 순간 즉시 끊길 수 있다. 지금 수천 명이 경제적으로 공중에 떠 있는 상태다.
병사들이 러시아로 돌아올 때, 대부분의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에 접한 벨라루스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간간이 허용되는 전화 통화를 제외하면, 그들은 한 달 가까이 가족과 격리된 채 FSB와 군 검찰, 러시아 연방 수사위원회의 심문을 받는다.
장교들은 반역이나 협력의 흔적이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고 수사관들은 형사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파헤치려 한다. 2022년, 대규모 징집에 나섰던 러시아는 자발적 항복을 범죄로 규정했었다.
올해 초 항복한 병사를 처벌하기 위한 형사 재판이 처음 열렸다.
귀환 병사 로만 이바니신은 이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자발적 항복, 자발적 항복 시도, 군 부대 이탈 등이다.
귀환 포로들은 한달 동안의 심문이 끝난 뒤 대부분 원 소속부대로 다시 보내진다.
그러면 상당수가 처벌의 의미로 전투가 아닌 청소 등 허드렛일과 혹독한 훈련에 투입된다.
곧바로 다시 전선에 투입되는 병사들도 많다. 이들 역시 처벌의 의미로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다고 가족들이 비난한다.
◆"포로는 없다, 오직 배신자만 있을 뿐"
포로에서 귀환한 병사들이 겪는 고초 때문에 가족들이 아들이 포로 교환 대상에서 제외되도록 로비하는 일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포로 수용소 환경은 고문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포로수용소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지난 8월 동부 우크라이나의 차시우 야르에 배치됐던 31세의 이고르 돌고폴로프가 전쟁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고향에 전해졌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포로 교환으로 석방된 뒤 곧바로 다시 전선에 투입될 것을 걱정한다.
돌고폴로프의 한 친척은 귀환 포로들은 고향 부대에서 모욕을 당하고 수난을 겪는다면서 차라리 우크라이나에 남아 살면서 시민권을 취득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해 초, 전쟁포로 파벨 구구예프가 외국 정부와 협력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최대 8년 형을 선고받을 위험에 빠졌다.
그는 귀환 한 달 뒤 찰영한 영상에서 FSB의 심문을 받은 뒤 군 병원으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그곳에서 다른 병사들이 그에게 왜 자폭하지 않았느냐는 힐난을 받았다.
구구예프는 FSB가 포로 귀환 병사들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했으며 전선에 재투입된 병사들은 총기를 다루지 않는 허드렛일만 맡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제크는 집으로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제크는 러시아 감옥 은어로 강제노동에 투입되는 죄수를 뜻한다.
많은 포로들이 심문 뒤 가족에게 보내지지 않고 곧바로 소속 부대로 보내지지만 총기를 받지 못한 채 허드렛일만 하게 된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에서는 독일에 포로가 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명령이 수도 없이 내려졌었다.
당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우리는 포로를 갖지 않는다, 오직 배신자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이 지금도 유효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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