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김수빈 인턴 기자 = 유럽 전역에서 최소 197명의 아이를 둔 정자 기증자가, 암 발병 확률이 매우 높은 희귀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국제적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10일(현지시각) BBC 등 외신들에 따르면 해당 남성은 TP53 유전자 돌연변이, 즉 리-프라우메니 증후군(Li-Fraumeni syndrome)의 주요 원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 의료기관은 이 유전자가 있을 경우 40세 이전 암 발병률 약 50%, 60세 이전 발병률은 무려 90%에 달한다고 설명한다.
기증자는 덴마크의 민간 정자은행 ‘유럽정자은행(ESB)’에만 정자를 제공했으나, 이 정자는 14개국 67개 클리닉에 유통돼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기증자는 정자 기증 당시 "이러한 돌연변이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에드위주 카스페르 프랑스 루앙대병원 생물학자는 지난 5월 초기 조사에서 "해당 남성이 최소 67명의 아이를 뒀다"고 전했다. 당시 23명의 아이가 기증자와 같은 돌연변이 유전자를 보유했으며, 이 중 10명은 뇌종양, 호지킨 림프종 등 암 진단을 받았다고 전해졌다.
최근 영국 BBC 등 14개 유럽 공영 방송사가 정보공개청구와 의료진·환자 인터뷰를 통해 대규모 조사를 진행한 결과, 최소 197명의 아이가 해당 기증자의 정자를 통해 태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모든 국가 데이터가 확보되지 않아 최종 수는 증가할 수 있다.
클레어 턴불 영국 런던 암연구소 암 유전학 교수는 "리-프라우메니 증후군 진단은 평생 소아암을 포함한 암 발병 확률이 높아 주변 가족에게 매우 참혹한 소식일 것"이라며, "만 명 중 한 명에게 있을 법한 희귀 돌연변이 유전 질환 보유자의 정자가 많은 아이들의 탄생에 사용된 불운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유럽정자은행은 2023년 11월 추가 조사를 진행하고 해당 기증자의 정자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정자를 기증받은 부모들 중 일부는 관련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정자를 기증받은 한 프랑스인은 "2025년 6월에야 연락받았다"며 "'2년 전 전산 시스템 이전 과정에서 파일이 분실돼 정보 통지가 지연됐다'고 연락받았다"고 설명했다.
덴마크 보건 당국은 "아직 덴마크와 벨기에서 정자를 기증받은 가족 중 일부는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유럽정자은행 측은 "법에 따라 당국과 병원 측에 통보했다"면서 "환자들에게 알리는 것은 병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증자에게는 암 질환이 없었고, 이런 유전자 돌연변이는 사전 선별 검사에서 검출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스웨덴의 한 암 유전학 겸임 교수는 "기증자는 잘못하지 않았다. 정자 기증자의 아이들은 대부분 건강하다"면서, "이번 사례는 관련 법률과 정자은행의 의료 시스템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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