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만에 학생들 장시간 발표 가능할 정도로 성장
서울·성남·동탄 등 타 지역서 IB 교육 위해 전학·이사 러시
"농촌에서도 세계 수준 교육 가능" 교육격차 해소
[안성=뉴시스] 박종대 기자 = 지난 7월 9일 오후 3시께 경기 안성시 죽산중·고등학교 시청각실. "민주주의, 이름만 아는 당신에게"라는 주제로 죽산고 1학년 학생이 단상에 서서 10분 이상 또래 학생들 앞에서 발표했다.
빨간색 좌석마다 빼곡히 앉은 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단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발표를 경청했다. 연단에 선 학생은 친구들에게 "최악의 권력자가 나타났을 때 이를 제지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며 "우리는 국민이 아니라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나온 청소년들의 민주주의 참여 의미를 묻는 질의에는 "투표권은 현재 없지만 곧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민주주의의 의미와 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이는 전형적인 강의식 수업이 아닌 학생이 주도하는 '국제 바칼로레아(IB)' 수업의 한 장면이다. 장정우 죽산고 DP코디네이터는 "불과 5개월 만에 1학년이 벌써 대본 없이 발표할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며 "1·2·3학년 3년 과정을 거치면 한국 교육과정에서의 단순한 암기식 교육을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학생 중심 탐구형 수업으로 완전히 바뀐 교실 풍경
죽산중고등학교에서는 이날 'IB 인증학교 수업 공개의 날' 행사를 가졌다. 이를 통해 전국 최초 공립 중·고 연계 IB 운영학교로 자리매김한 죽산중·고등학교의 교육 성과를 공개했다. 농촌 소도시 안성에서 피어난 세계적 수준의 교육 혁신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이 중 'TED X Pre-DP'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수업에서는 학생 10명이 각자의 관심 주제를 가지고 발표에 나섰다. '미래를 위한 가장 오래된 참고서, 역사'부터 '동화, 시대를 비추는 거울'까지 다양한 주제로 학생들이 직접 탐구하고 분석한 내용을 다함께 공유했다. 교사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진행자 역할을 맡았을 뿐,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발표하며 토론하는 것이 수업의 핵심이었다.
IB 교육의 핵심은 학생 중심의 탐구형 수업이다. 기존의 교사 주도 강의식 수업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죽산중 1학년 최유라 학생은 "작년보다 건물도 좋아지고 전자칠판도 쓰면서 선생님들이 PPT도 만들어서 하시는 게 재밌다"며 "일방적으로 했던 수업과 달리 학생들과 많이 얘기하면서 소통하는 수업"이라고 설명했다.
죽산중 1학년 견혜주 학생은 "답이 딱 정해진 게 아니고 학생들이 생각을 더 표현할 수 있는 교육 방식"이라며 "딱딱하지 않아서 창의력이 풍부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학년 김도현 학생은 "일반 학교는 정답이 우선이라면 IB 학교는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더 중요시해서 부담 없이 배울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수업 방식의 변화는 평가 방식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객관식 중심의 암기형 시험에서 서술형·논술형 평가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죽산고 2학년 강민서 학생은 "기말고사를 다 서술형으로 보고 수행평가도 외부 평가형식에 맞춰 영어 말하기와 편지 형식 글쓰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학년 신은성 학생은 "중간·기말고사는 논술 비율이 70~80%, 영어는 100%"라며 "점수 따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죽산중·고등학교의 IB 도입은 단순한 교육과정 변화가 아닌 농촌 소규모 학교로서는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1952년 개교 이래 7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학교는 2022년 3월 미래형 통합운영학교로 새출발했다. 이어 불과 3년 만에 전국 최초 공립 중·고 연계 IB 운영학교라는 성과를 거뒀다
현재 죽산중학교는 총 118명(남 62명, 여 56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죽산고등학교는 194명(남 105명, 여 89명)이 다니고 있다. 소규모 학교의 특성을 살려 개별 맞춤형 교육이 가능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유광종 교장은 "시골 아이들과 중학교 아이들 같은 경우 가정 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이 어디 가서 주먹을 들어서 발표도 못하던 아이들이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발표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받았다"며 "시설과 환경이 주는 영향력이 굉장히 크고, 아이들이 변화된 모습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죽산중·고등학교의 성공 비결은 미래형 통합운영학교라는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데 있다. 일반적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돼 있으면 진학 시 교육과정이 단절될 수 있지만, 통합 운영을 통해 중1부터 고3까지 일관된 IB 교육이 가능해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이 학교가 농촌지역의 열악한 교육 여건을 극복하고 미래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2024년 6월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사업으로 스마트 교실과 체육관, 기숙사 등을 완공하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혁신했다.
◇전국 단위 IB 교육 허브 역할…타 지역 학생들 전학 러시
특히 2023년부터 추진된 학교 개축과 기숙사 신축은 IB 교육의 안정적 정착에 핵심 역할을 했다. 최신 교육시설을 바탕으로 학생 중심의 탐구형 수업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특히 이 학교는 기숙사 운영을 통해 농촌지역에서도 세계 수준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며 전국 단위 교육 혁신을 이끌고 있다.
기숙사는 생활실 8실, 자기주도학습실 2개소(88석), 사감실 2실 등을 갖춰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학생들은 평일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일요일에는 9시10분부터 11시까지 자기주도학습 시간을 갖는다.
기숙사 입사 시에는 원거리 통학생과 사회적 배려대상자를 우선 선발하되, 성적 상위 40% 이내 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이를 통해 거리상 제약으로 우수한 교육 기회를 놓칠 수 있는 학생들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기숙사에 입사한 30여 명 학생 중 상당수가 서울·성남·수원·동탄 등 타 지역에서 IB 교육을 받기 위해 온 학생들이다.
죽산고 1학년 남재현 학생은 "제주에서 IB교육을 하고 있는 표선고를 지원했다가 떨어져서 여기 왔는데, IB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왔다"며 "어렵긴 하지만 탐구하고 진로와 연결하면서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학부모들도 자녀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죽산중 2학년 학부모 김민희 씨는 "아들이 조금 섬세한 친구라서 완전히 자라기 전에는 나서는 일이 많이 없었는데, IB 교육을 받으면서 앞에 나서서 발표를 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부분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두 자녀를 죽산중고에 보내는 김사비나 씨는 "주입식 교육보다는 토론하고 아이가 주제를 설정해 고민하고 실험해보는 학습으로 자존감도 높아지는 것 같다"며 "발표를 전혀 안 했던 아이들도 모든 아이가 발표해야 하니까 서로 기다려주고 부정적인 것도 해결해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이 좋다"고 말했다.
이정우 안성교육지원청 교육장은 "교장 선생님들과 지역 소규모 학교의 발전 방향, 선생님들의 개선 의지가 서로 잘 접목된 결과"라며 "관심학교들이 인증학교 사례를 벤치마킹하며 자생적으로 생기고 있어 학부모들도 교육의 질적 향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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