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최후 잔류 AP기자 3명 “본사 철수 명령하면 무시하려 했다”

기사등록 2025/04/30 10:37:00 최종수정 2025/04/30 11:58:24

AP 통신, 30일 종전 50주년 맞아 베트남전 ‘최후의 보도’ 전해

4월 30일 사이공 미 대사관 해병대 헬기 탈출 장면 보도

사무실 들어온 북베트남군 위협 대신 “지도보며 자신들 진격 과정 설명”

[AP/뉴시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군 해병대 헬기가 비상 탈출하는 장면. AP 통신 사이공 지국에서 촬영, 세계로 타전해 미국 베트남전 패배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2025.04.30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헬기 한 대가 탈출하는 사진은 미국의 패배로 베트남 전쟁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 됐다.

그래서 4월 30일은 베트남전 종전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AP 통신은 29일(현지 시간) 베트남 전쟁 및 종전 과정에서 종군 기자들이 어떤 악조건에서 기사와 사진을 송고했는지 분투기를 소개했다. 

◆ 사이공 미 대사관 해병대 헬기 탈출 장면

AP 통신 사이공 지국 기자들은 지난 밤 밤새도록 포격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다 마지막 남은 미 해병대원들이 대사관 옥상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모습을 쌍안경으로 지켜보았다.

사무실 밖 계단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군이 신은 고무 샌들 소리가 들리자 놀라지 않고 구금이나 체포 가능성에 대비했다.

그런데 젊은 북베트남 군인 두 명은 사무실에 들어와서도 악의적인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기자들은 계속 송고를 했다.

피터 아넷, 조지 에스퍼, 그리고 맷 프랜졸라 3명의 기자는 군인들에게 콜라와 케이크를 건네고 사이공으로 진군한 북베트남군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사무실에 걸린 지도를 보며 진군 경로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때 사진작가 사라 에링턴이 암실에서 나와 전 세계에 공개될 상징적인 사진, 즉 미 해병대 헬기의 탈출 장면 사진을 촬영했다.

50년 후 아넷 기자는 믿기 힘든 장면이 벌어진 후 뉴욕에 있는 AP 본사의 텔레타입 송신기에 입력했던 메시지를 기억했다. 

“베트남 전쟁을 13년간 취재하면서 오늘처럼 끝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AP 통신 지국에서 무장한 북베트남 군인과 콜라와 페이스트리(pastry)를 먹은 몇 시간 후 남베트남은 완전히 항복했다니? 우리에게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고 회상했다.

‘사이공 함락으로 20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과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베트남인이 사망한 전쟁이 끝났다’는 기사를 하루 종일 보낸 뒤 통신선은 끊어졌다.

◆ AP, 베트남전 보도 중 4명 사망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에서 AP 통신의 활동도 마감됐다. 아넷은 다음달인 5월 회사를 떠났고, 프란졸라는 추방됐으며 에스퍼 지국장도 그 뒤를 따랐다. 지국은 1993년 다시 문을 열었다.

AP는 1950년 사이공에 첫 사무실을 열었는데 당시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의 지휘 하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시기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가 물러간 뒤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됐다.

이듬해 프랑스를 뒤이어 미국이 공식적으로 군사 개입하기 시작해 1975년 물러날 때까지 20년간의 베트남 전쟁의 수렁의 빠졌다.

말컴 브라운은 1961년 11월 사이공의 AP 지국장을 맡았고, 1962년 6월 아넷과 사진 책임자 호스트 파스가 합류했다.

이 세 사람은 곧 퓰리처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브라운은 1964년, 파스는 1965년, 아넷은 1966년이다.

AP는 베트남전 보도로 다섯 차례 퓰리처상을 받았는데 그중 첫 번째다.

AP 사진기자 4명이 전쟁을 취재하던 중 사망했고, 최소 16명의 AP 기자가 부상을 입었다.

아넷에 따르면 처음부터 많은 보도가 워싱턴의 공식 발표 내용과 모순됐다. 미국이 인정한 것보다 더 깊은 미국의 개입 의지가 드러났다. AP는 베트콩 게릴라에 대해 성공 가능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했으며 무능하고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반감을 보도했다.

올해 90세가 된 아넷 기자는 “우리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우리의 보도는 정당하다는 것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AP/뉴시스] 1966년 피터 아넷(가운데)이 퓰리처상 수상을 통보받은 후 앞서 이 상을 받은 말콤 브라운(왼쪽), 호스트 파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2025.04.30. *재판매 및 DB 금지

◆ AP 통신의 전쟁 보도

전쟁이 한창일 당시 AP 통신은 약 30명의 직원을 현장에 배치돼 뉴스, 사진, 행정 업무를 담당케 했다.

AP는 주로 사진작가를 비롯한 프리랜서 인력을 정기적으로 활용했다. 11개국 출신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현지 베트남인이었다.

전투가 격화되면 다른 부서에서 직원들이 교대로 와서 도움을 주곤 했다.

1966년 미국 정부가 AP의 보도에 분노해 직원들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주장했을 때 AP의 총괄 매니저 웨스 갤러거는 그들이 기자로 일한 수십 년의 경력이 있다고 반박했다.

베트남에서 보도되는 뉴스를 관리하기 위해 미국은 사이공에서 매일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에 정보를 제공했다.

에스퍼 기자는 “이 기자회견은 ‘5시의 바보들(Five O'clock Follies)’라는 속어로 불렸다”며 “정말 농담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직접 취재한 내용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에스퍼는 “국방부와 백악관으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 거리와 옥상에서 보도

1969년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국 병력은 50만 명이 넘었으나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으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철수에 동의하면서 병력이 소수로 줄어들었다.

남베트남은 스스로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1975년까지 AP 지국도 축소되었고 북베트남군과 동맹군인 베트콩 게릴라 부대가 사이공을 향해 진격하자 대부분의 직원들은 대피했다.

아넷, 에스퍼, 프랜졸라는 자신들이 수년간 취재에 바쳤던 일을 끝까지 보고 싶어서 자원해 뒤에 남았다.

뉴욕 본사에서 철수하라고 해도 무시하기로 공모했다고 아넷은 증언했다.

에스퍼는 “끝을 보고 싶었다”며 “조금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내가 떠나면 남은 인생 동안 스스로를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사관 최후 탈출 헬기’ 사진을 보낸 뒤 프랜졸라와 아넷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그들이 미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건물을 약탈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전날 대피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들의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넷은 “뒷마당에 쌓인 젖은 문서와 부서진 가구들 위에 1968년 설날 공세 시작 직후 대사관 공격으로 사망한 미군 병사 다섯 명의 이름이 새겨진 무거운 청동 명판을 발견했다”며 그것을 AP 사무실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 전쟁 중에도 통신사는 경쟁

오전 10시 24분, 아넷은 대사관 약탈 사건을 기사로 쓰고 있었는데 에스퍼는 사이공 라디오에서 남베트남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속보를 보냈다.

“에스퍼는 텔레프린터로 달려가 뉴욕에 메시지를 보내고, 곧 AP가 UPI보다 5분 앞서 항복 기사를 내보냈다는 만족스러운 소식을 접한다”

아넷은 당시 AP의 최대 경쟁사였던 UPI를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전시나 평시나 통신사들은 경쟁을 중시한다”

에스퍼는 항복 소식에 대한 남베트남 군인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갔고, 중앙 광장에 있는 동상 옆에 서 있는 경찰을 만났다.

그 경찰은 팔을 휘두르며 “끝났어, 끝났어”라고 말하며 자신이 가진 권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180도 돌아서서 기념 동상에 경례한 후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충격을 받은 에스퍼는 사무실로 달려가 4층 계단을 올라 사무실로 가서 사건에 대한 짧은 기사를 보냈다. 타이핑하는 동안 그의 손은 떨렸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탱크의 지원을 받은 더 많은 군인들이 도시로 진격해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고 AP 기자들은 계속해서 기사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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