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권세연 '창의격문' 보니…"괭이·삽 들고 나서자"

기사등록 2025/02/21 14:18:22 최종수정 2025/02/24 09:59:56

한일문화연구소,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한 격문 입수

[울산=뉴시스] 권세연 의병장의 안동 창의소 격문. (사진=김문길 소장 제공) 2025.02.2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울산=뉴시스] 조현철 기자 =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관련 임진전쟁(왜란) 정신을 계승한 권세연(權世淵) 의병장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입수했다고 21일 밝혔다.

한일문화연구소에 따르면 1592년 4월 13일 임진전쟁이 발발, 왜군을 막지 못한 것은 당시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간 오랜 당파싸움 탓이다. 왜군은 침략한지 2시간 만에 부산진성을 함락했다. 2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영천성을 함락했다. 이후 권응수 창의군이 영천성을 회복했다.

임진전쟁은 선량한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고 귀·코를 잘라간 비참한 전쟁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창의 정신을 계승해 온 권응수 후손들이 일제 탄압을 전국에 알렸다. 그래서 영천은 호국의 도시가 됐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분개해 다시 창의소를 세우고 경상도 일대 의병을 모았다.

창의격문을 보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인 1895년 11월 3일 공포됐다. '임진전쟁 왜군이 처들어 와 싸운 고장' '농민들이 일어나 나라를 위해 괭이와 삽을 들고 가자' '상매용 수래에 군량미를 실어라' '안동관찰사를 습격하자' 등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일제 신식군대에 의해 권세연 의병은 격퇴되고 말았다.

명성황후는 목숨을 잃었으나 전국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고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일제는 이를 무단정치(武斷政治) 계기로 삼았다.

김 소장은 "왜군을 처음 격퇴한 영천은 '의병의 고장'이라고 불린다. 권응수와 그의 후손 권세연의 업적이라고 일본인들이 일컫는다"면서 "수년전 영천시장이 호국사상을 심어준 고장이라며 한 유명한 일본인을 초빙해 강연도 한 바 있다. 첫 마상축제도 개최했다"고 전했다

한편 이 사료는 안동 권씨 권세연 후손들이 서울 민족문화연구소에 알려 일본 교토대학 조선사연구회가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식민지 조선에 살아있는 도록·문서'. 미즈노 나오기 외 3인 저. 이와나미 출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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