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95% 제외된 편의시설 설치 의무…국가에 배상 청구
대법 "24년 동안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접근권 유명무실"
[서울=뉴시스] 이종희 기자 = 경사로와 같은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소규모 매장에 부여하지 않아 장애인의 접근권이 제한됐다면 국가가 당사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1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A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 중 국가배상청구 부분을 파기자판하고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파기자판을 통해 원고 가운데 장애인인 2명에게 1인당 1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파기자판은 상급심 재판부가 하급심 판단에 잘못이 있다고 보고 원심을 깨면서 사건을 돌려 보내지 않고 직접 판단하는 것이다.
A씨 등은 국가가 24년 동안 구 장애인편의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아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장애인 접근권이 형해화됐다고 주장하면서 국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장애인등편의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제공 의무를 부담하는 소규모 소매점의 범위를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 위임하고 있다.
1998년 제정된 구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제공의무를 부담하는 소규모 소매점의 범위를 '바닥면적의 합계가 300㎡ 이상의 시설'로 정했다.
시행령 규정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 중 97% 이상이 장애인 편의제공의무에서 면제된다. 이 시행령은 2022년까지 개정되지 않았다.
1심과 2심은 국가가 해당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위법하다고 하더라도, 고의나 과실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24년 넘게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국가의 행정입법 부작위가 위법한 지, 만약 위법하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되는 지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장애인의 접근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으로서의 지위를 갖기 때문에 국가가 장애인의 접근권을 개선해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봤다. 따라서 국가가 정당한 이유 없이 개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위법한 행정입법 부작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최소한 2008년 4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시행령을 개선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14년 동안 이행하지 않아 장애인에 대한 접근권이 제한됐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피고는 14년이 넘도록 이 사건 쟁점규정에 대한 행정입법의무를 불이행한 부작위로 인해 장애인등편의증진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입법 취지와 내용이 장기간 실현되지 못했다"며 "불이행의 정도가 매우 커 법률이 보장하고자 한 지체장애인의 접근권이 유명무실해졌으므로, 피고의 부작위는 위법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시행령이 95% 넘는 소매점을 설치의무 대상시설에서 제외하고 있는 점, 장애인 단체를 비롯해 유엔(UN) 장애인권리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도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점 등을 이유로 국가배상법에서 정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에 위반'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위자료를 1인당 10만원으로 책정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개선입법의무가 장기간 불이행됨에 따라 장애인이 입은 불이익이 크나, 불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피해자의 범위가 넓다"며 "피고 스스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 등을 함께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장애인 접근권이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최초로 판시했다"며 "장애인의 권리를 미흡하게 보장하는 행정입법에 대해 법원이 사법통제를 함으로써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장애인의 권리가 법원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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