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情景] 김동률과 명곡 남긴 주인공…18일 하늘나라로
"내가 살아온 작은 세상은 / 어릴 적 꿈이 가득한 나즈막한 동산이었지 / 아주 조용한 / 가끔 들리는 아이들 소리에 / 고무공 하나 들고 별이 뜨는지도 모르던 곳에 / 지난날의 꿈이"('향수' 中)
"울먹이는 날 위해 무심한 밤은 / 다시 나를 재우고 / 눈물로 젖은 내 술잔 속엔 / 나의 웃음이 또 한숨이 / 출렁이는 달빛에 흘러가네 / 날 깨워줘"('꿈속에서' 중)
90년대 풍경을 머금은 듀오 '전람회'가 정식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올해 12월18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서동욱(50)은 말간 뮤지션이었다. 1994~1997년 활동한 전람회 대다수 곡의 멜로디는 김동률이 쓰고 불렀고, 그가 상당수 곡의 작사도 했다.
그런데 전람회 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서동욱의 작사 실력도 빼어났다. '하늘높이', '향수', '유서', '마중가던 길', '꿈속에서'의 노랫말은 그가 붙인 것이다.
'기억의 습작' 등 김동률 가사의 장점은 서사를 짓는 거라면, 서동욱의 장점은 정경을 빚어내는 데 있다. 자신의 기억과 상상 그리고 꿈을 서정적이면서도 투명하게 문장에 담아 진심을 전달했다. 문장을 여러 번 깎아낸 흔적들이 아니라 한 번에 꾹꾹 담았을 거 같은 그런 자국들이다.
또한 감성의 농도가 짙은 김동률의 보컬과 달리 서동욱의 목소리는 담담한 향기를 가물가물 기억나게 만들었다. 단독 보컬을 맡았던 2집 수록곡 '마중가던 길', 3집 수록곡 '다짐'에서 그는 조심스럽지만 누구보다 단호한 마음을 노래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인 서동욱이 대학시절 미식축구에 전력했던 사실은 대중에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진중하고 서정적인 전람회 이미지와 단번에 조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그런데 서동욱이 과거 존재했던 동닷(김동률 홈페이지)에 쓴 미시축구 에피소드에 따르면, 그는 가장 좋아하는 운동으로 미식축구를 꼽았다. 미식축구엔 과격하게 몸을 부딪히는 포지션만 있는 건 아니다. 다양하다. 서동욱은 테일 백(tail back)이었다. 풀백(후방 공격수) 뒤에 위치하는 포지션이다. 주로 러닝 플레이를 맡아 스피드가 빨라야 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의 타이틀롤 포레스트 검프(톰 행크스)를 떠올리면 된다.
서동욱이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공동체에 있었다. 그는 "시합에서 이긴 후에 모든 선수들이 모여서 벌이곤 하는 맥주 마시기 릴레이 시합을 여러분도 보셨다면, 어쩌면 모두 우리 팀에 들어오고 싶어지실지도 모른다"고 자부했다. 서동욱은 베이스를 연주해야 하는 자신이 시합 도중 다칠까 김동률은 미식축구를 싫어했다고 했다.
서동욱은 또한 맺고 끊음이 분명한 담백한 사람이었다. 전람회가 해체한 뒤 음악에 미련을 접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 앤 컴퍼니를 비롯 뉴욕과 홍콩 등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세상을 뜨기 전까지 모건스탠리 프라이빗 에쿼티 부대표를 맡았다.
서동욱은 무엇보다 자신이 연주한 베이스를 꼭 닮은 사람이었다. 단아함, 솔직함, 스트레이트포워드니스(Straightforwardness·똑바름). 경박스럽지 않고 차분함. 베이직(Basic). 그는 이런 느낌들을 좋아했다.
서동욱은 동닷에 이렇게 썼다. "93년 '꿈속에서'를 녹음하고 난 다음에, 녹음기사님이 웃으시며 ‘대한민국 음반 역사상 실제 녹음에 사용된 싸구려 악기 부문 신기록’이라고 농담을 하시더군요. 그 이후로는 몇백만원이 넘는 좋은 베이스를 몇 개나 가질 수 있었지만, 제 마음속에서 저의 첫 악기였던 그 낡은 베이스는 언제나 가장 사랑스런 악기로 남아있답니다."
접혀 있던 삶의 귀퉁이를 가끔 소중히 다시 펴게 만들어줬던 서동욱. 감사했습니다. 편히 쉬세요.
"하얀 꿈을 꾸고 있네 / 어디인지도 모른 채 / 어둔 세상은 모두 잠들고 / 나의 숨소리뿐"('꿈속에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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