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보물도, 용지도 어려워요"…투표용지에 '그림' 넣어달라는 발달장애인

기사등록 2024/10/29 14:32:24 최종수정 2024/10/29 14:50:03

발달장애인 1054명 글씨·그림 탄원서 제출

1심, 본안 심리 없이 각하 판결…"입법 먼저"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한국피플퍼스트 등 장애인 단체가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발달장애인 그림투표용지 보장 차별구제청구소송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0.29. photocdj@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성하 기자 = '유권자의 축제'로 불리는 선거날에도 축제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뽑을 후보보다 투표 방법에 더 고심하는 발달장애(지적·자폐)인이 그들이다. 18세 이상 국민이지만 글자만으로는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기 어려운 이들에겐, 글자로 가득 찬 선거 안내물이나 공보물은 암호처럼 느껴진다. 혼자 들어간 기표소에서 숫자와 글자만을 보고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식별하기도 어렵다.

지난 2022년 1월 대선을 앞두고 발달장애인들은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 정당 로고·후보자 사진이 포함된 그림 투표용지 제공을 요구하며 국가를 상대로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1심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현행 공직선거법에 위배된다며 본안 심리를 하지 않고 각하했다. 국회 차원에서 입법이 선행돼야 할 문제지 법원 판단을 통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취지다.

한국피플퍼스트를 비롯한 장애인 단체 5곳은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 모여 29일 참정권 보장 수단을 마련해 달라는 의미를 담아 발달장애인 1054명의 손글씨와 직접 그린 투표용지 등 탄원서를 제출했다. 차별구제청구소송 2심 선고기일이 다음 달 6일로 예정돼 있어서다.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한국피플퍼스트 등 장애인 단체가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발달장애인 그림투표용지 보장 차별구제청구소송 제출 기자회견 전 그림투표 용지를 원하는 발달장애인들의 그림 탄원서를 전시하고 있다. 2024.10.29. photocdj@newsis.com

이들은 "국가가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동일한 투표용지를 제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발달장애인이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게 만든다"며 "발달장애인에게 그림투표용지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차별행위"라고 했다.

소송 원고인 발달장애인 박경인씨는 "투표권은 장애가 있든 없든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는 권리"라며 "발달장애인이 그림투표용지로 투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와 대만, 아일랜드,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0여 개 국가에서는 발달장애인 등 인지·언어 이해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보조 수단을 마련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든 투표자에게 입후보자의 성명과 사진, 소속정당명 및 로고가 병기된 투표용지를 제공하고 있다. 선거권자가 글자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선호하고 투표하고자 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찾아 투표할 수 있는 셈이다.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한국피플퍼스트 등 장애인 단체가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발달장애인 그림투표용지 보장 차별구제청구소송 제출 기자회견 전 그림투표 용지를 원하는 발달장애인들의 그림 탄원서를 전시하고 있다. 2024.10.29. photocdj@newsis.com

이들은 정당의 로고나 후보자의 사진 등 시각적인 것들이 한 표를 제대로 행사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거듭 강조하며 "발달장애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동등하게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 있는 조치를 다하도록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또 "공보 현수막과 공보물에는 후보자의 얼굴과 번호, 정당의 로고와 색깔이 들어가지만, 정작 투표용지에서는 그러한 정보들을 확인할 수 없다"며 "기표용지의 정보를 더 다양하게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이미지, 로고, 색깔 등을 넣어 제공할 경우 많은 국민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림 투표용지가 발달장애인뿐 아니라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문해자와 저시력자를 위해서도 유용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유권자인 청소년이나 노인, 이주민 등 다양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최신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발달장애인은 27만2524명이다. 피플퍼스트 서울센터는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18만6182명을 18세 이상 유권자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18세 이상 인구(약 4438만 명)의 0.4%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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