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서초 0곳…"환자 제때 치료하려면 2차병원 강화를"

기사등록 2024/08/14 17:00:54 최종수정 2024/08/14 19:16:52

"서초·강남 갈만한 2차병원 한 곳도 없어"

"이대로면 의료질·비용·접근성 모두 하락"

"단계별 기능 회복·지역 의뢰체계 확립을"

[서울=뉴시스]박진식 혜원의료재단 부천세종병원·인천세종병원 이사장이 14일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 2층에서 열린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미디어 아카데미에서 '환자 보호자로서 의사가 바라보는 바람직한 의료전달체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 백영미 기자) 2024.08.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백영미 기자 = 환자가 적정한 시간에, 적정한 병원에서, 적정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전달체계(환자의뢰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동네 병원(1차)과 상급종합병원(3차) 사이에 있는 2차병원(종합병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전문가 제언이 나왔다.

박진식 혜원의료재단 부천세종병원·인천세종병원 이사장은 14일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가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 2층에서 개최한 '미디어 아카데미'에서 강연자로 나서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수준의 의료를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의료비도 국민 총생산(GDP)의 4~5%선에서 부담하면 되는 나라로 평가받았지만 현재는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이날 '환자 보호자로서 의사가 바라보는 바람직한 의료전달체계'를 주제로 강연한 박 이사장은 '아이언 트라이앵글(철의 삼각)'을 구성하는 의료의 3요소인 의료의 질, 비용, 의료 접근성을 언급하면서 이론상 의료 자원은 한정돼 있어 세 가지 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지만, 균형을 찾아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급증으로 건강보험 재정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능이 약화된 2차 병원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전달체계는 1차·2차·3차병원으로 의료기관이 단계별로 구분돼 있다. 1차 병원은 경증 환자, 2차 병원은 중등증(중증과 경증 사이) 환자, 3차 병원은 중증·응급 질환 진료 기능을 담당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1차 병원에서 진료 의뢰서를 받아 3차 병원으로 건너뛰면서 이른바 '빅5' 등 상급종합병원 쏠림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박 이사장은 "서초구, 강남구에 머리를 다치면 갈 만한 2차 병원이 없다"면서 "40년간 2차 병원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왔고 서초구와 강남구에는 2차 병원의 기능을 하는 곳이 아예 없다"고 말했다.

의료전달체계의 붕괴를 촉진하는 제도로는 3차 병원 중심 평가 제도, 기능과 무관한 의료기관 종별 보상체계, 3차 병원 중심 응급 지원, 지역·단계와 무관한 의뢰 회송 등이 꼽혔다.

박 이사장은 실제 가족의 의료 이용 사례들을 예를 들면서 경증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2차 병원을 건너뛰고 3차 병원을 찾으면서 2차 병원의 기능은 약화되고 3차 병원은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3차 병원이 2차 병원의 역할까지 하게 되면서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이 대입을 치렀고 놀다가 뒤로 넘어져 머리를 세게 부딪힌 후 의식을 잃고 강남의 한 대형병원으로 이송됐다"면서 "CT를 찍어보니 문제가 없었다. 상급종합병원으로 이송했어야 했나, 또 이송을 받았다면 머리에 충격이 갔으니 적어도 관찰 구역에서 돌봤어야 하지 않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로부터 2년 후 아버지가 서초동의 한 마트에서 쓰러지신 후 의식을 잃어 119를 불렀지만 서초구·강남구에 갈 만한 2차 병원이 한 곳도 없었다"면서 "뇌출혈은 진행되면 호흡정지로 이어질 수 있는데 1시간 반을 구급차 안에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행히 한 곳이 연락이 닿아 진료를 받게 됐고 아버지는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면서 "병원장이고 인맥을 동원해도 중증 환자가 갈 곳이 없다는 게 의료 현실"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김근수 기자 = 9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 구급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2024.08.09. ks@newsis.com
박 이사장은 "2010년 축농증인 딸 아이를 데리고 3차 병원을 찾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면서 "2차 병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정작 3차 병원에 가야 할 중증 환자는 갈 곳이 없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필수의료는 붕괴되고 지방 의료기관들은 문을 닫고 있어 의료 접근성이 낮아졌다"면서 "현재 의료비가 국민 총생산 대비 9% 가량 되는데, 조만간 건강보험 재정도 파탄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행 의료전달체계가 지속되면 의료의 질과 비용, 접근성 모두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박 이사장은 "고령화로 국민 총생산이 정체된 상황에서 의료비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고령 환자를 지원할 수 있는 인구는 줄어 노년 부양비가 늘고 있어 병원에 모시고 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고령층의 복합질환 증가에 따른 통합의료시스템도 뒷받침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1,2차 병원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단계별 의료기관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박 이사장은 보고 있다. 정부가 수가 가산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해 지역의 1차 병원이 같은 지역 2차 병원에 환자를 의뢰하고, 2차 병원은 해당 지역 3차 병원에 의뢰하는 '지역사회 환자의뢰체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지역 내 환자의뢰체계가 확립되지 않으면 접근성, 비용, 의료의 질 중 어떤 것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것"이라면서 "단계별 의료기관들의 기능을 복원해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단계별 의료기관의 기능 중심으로 보상과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 이사장은 "1,2,3차 병원별로 보상체계, 역할, 환자풀(pool)도 다른데 같은 잣대로 평가해선 안 된다"면서 "기능에 맞는 평가 체계가 잡혀야 환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나마 현재 지역에 남아있는 2차 병원의 역할을 인정하고 환자를 의뢰하기 시작하면 차차 신뢰가 쌓여갈 것"이라고 했다.

박 이사장은 "이미 40년간 돌려온 수레바퀴를 멈추고 방향을 바꾸려면 10년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 "그 과정에서 2차병원과 지역병원들 힘을 복돋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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