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20일 개막…1년 간 전시
로버트 테리엔·민예은·시오타 치하루 등 국내외 10명 참여
글렌스톤뮤지엄 소장 루이스 브루주아 '밀실' 한국 첫 공개
영상설치로 부활한 100년 된 배롱나무 '테마 공간' 눈길
[제주=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 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었다…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파스칼)
미술 전시장은 '치유의 공간'이다.
번뇌와 슬픔을 녹이고 산산이 부서진 기억과, 날 선 추억도 뭉클함으로 되살아난다.
'감정적인 생기'를 돌게 하는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선물 같은 전시'다. 제주 포도뮤지엄(총괄디렉터 김희영)에서 마련한 올해 첫 전시로, 노화 가운데서도 인지 저하증(치매)을 조명한다.
회화, 설치, 영상 등 예술가 10명의 작품은 시간에 쫓기는 좀비 같은 삶을 구원 시킨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2021),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2022) 전시에 이은 '공감 전시' 3탄으로, 철학적이고 공감각 넘치는 깊이감을 전한다. 생로병사, 생멸의 운명을 가진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과 존엄함을 발견하게 한다.
특히 몰입형 설치미술로 선보인 '테마 공간'은 예술이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지를 느끼게 한다. 100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6미터의 거대한 배롱나무는 전시장에서 부활해 생명의 순환성과 회복력을 전한다.
심장박동처럼 울리는 오케스트라 현들의 편안하고 장엄한 선율과 함께 어우러진 작품은 사랑의 마음을 이어지게 한다. 녹음이 우거진 숲 한 가운데 생명의 기운을 머금어 싹을 틔우고, 초록 잎이 무성해지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다가 노쇠한 겨울을 맞이한 후 모든 여정을 마치고 별이 되어 돌아가는 장면이 삶처럼 반복된다. 지난해 포도뮤지엄에서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관객들의 실제 비디오 영상도 등장해 공감력을 더한다.
◆포도뮤지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치매와 기억의 탐구
"모든 날 중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한번도 웃지 않은 날이다."
주름진 손으로 백발을 빗고 있는 흑백 사진과 함께 노란벽에 써 있는 글은 김희영 총괄 디렉터가 "이 전시를 해야겠다고 용기를 갖게 한 문구다."
치매를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예술적인 시각으로 탐구하는 이 전시는 기억이 무너지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김희영 디렉터는 "고령화 시대 어느 나라이든 남녀노소 똑같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치매"라며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면서 더욱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전시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캐나다 개념 미술가 알란 벨처(Alan Belcher)의 도자기로 만든 '바탕 화면'으로 시작해 천경우의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로 끝맺음하는 전시는 알찬 포도알처럼 엮어져 진정성이 전해진다.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 & 이반 실 ▲데이비스 벅스 ▲시오타 치하루 등 10명의 작품이 하나의 이야기로 흡입력 있게 연결되어 전시 연출력이 돋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20세기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세계적 조각·설치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밀실 1'이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어 눈길을 끈다.
미국 글렌스톤 뮤지엄 소장품으로 김희영 디렉터의 '초심 정신'이 통했다. "턱도 없을 것이라며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는데, 흔쾌히 대여해줬다"며 설렘을 보인 김 디렉터는 "복원 전문사가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작품과 함께하겠다는 각오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는데, 뮤지엄의 역할을 하는 적극적인 모습에 감동 받았다"면서 "작품을 공개했을 때 마치 마녀가 살아 나온 것 같은 기운이 전해졌다"고 소개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짝들이 벽처럼 둘러 서있는 작품은 문틈 사이로 들여다 보게 한다. 앙상하고 낡은 철제 침대, 유리병과 의료 도구들, 각종 물건들이 가득한 내부는 누군가의 고립된 세월과 위축된 심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 공간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두려움도 서려 있다.
◆참여 작가들 "모든 작품 감정적으로 서로 연결…아름다운 전시"
18일 제주 포도뮤지엄에서 만난 참여 작가들은 전시에 만족한 모습이었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작가 데이비스 벅스는 "이번 전시가 생로병사의 주제와 맞닿아 있으면서 폭넓은 분야를 커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들과 기억과 추억에 대해 많이 대화했는데 누군가 '기억이란 현재가 만들어낸 부속물'이라고 했다며 이 표현을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가 실재하고, 실재하는 과거가 계속 진화하는 것"이라는 그는 "사실 기억도 과거도 단지 현재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하고 시뮬레이션하는지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조각난 캔버스와 합판으로 파란 하늘과 초록 들판의 풍경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의미의 풍경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도 여전히 또 다른 풍경을 펼쳐내는 작품이다. 작가는 파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해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상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국 전시를 위해 특별히 새로 제작한 세라믹' jpg 연작'과 파란색 신작을 설치한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알란 벨처는 "이번 전시를 보면서 하나의 스토리를 쭉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수년간 방치되었던 노트북을 다시 켠 것처럼 깨진 이미지 파일들을 벽면에 즐비하게 전시한 그는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기억해 낼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무력감을 상기 시키며 '기억이 사라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기억과 인지 상실의 주제로 작업해온 이반 실 작가는 "이 전시는 당연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 다양한 작품들의 조합이 흥미롭다"면서 "모든 작품이 명시적인 메시지를 건네지 않고도 연결되는 점이 좋다"고 했다.
설치미술가 민예은은 치매로 인한 쪼개진 기억을 시각화했다. 바닥이 없이 모서리가 날카로운 천장과 벽으로만 이뤄진 작품은 중력에서 벗어나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로버트 테리엔 작품과 함께 선보이는데 마치 한 작품처럼 어울린다.
민 작가는 "로버트 테리엔 재단 관계자들도 '두개의 작품이 브라더 앤 시스터 같다'는 이야기를 해줬다며 저도 세트로 묶여서 같이 다니고 싶다"는 기분 좋은 바람을 전했다.
생전 로버트 테리엔과 함께 작업했고 그가 별세 후 재단에서 일하며 이번 전시에 무제(패널룸)를 설치한 폴 채르윅과 딘 애니스는 "이번 전시를 관람하며 밴 다이어그램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모든 작품들이 강력한 개성을 갖고 있고 동시에 감정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매끄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전시"라고 평했다.
로버트 테리엔은 미국 출신 현대미술 작가로 평범한 사물의 크기를 확대하거나 축소해 일상적 풍경을 낯선 풍경으로 바꿔 놓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2019년 작가의 작고 이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2년 가나아트에서 개인전이 열린 바 있다.
이반 실 작가는 "소리와 회화를 같이 연출하는 공간으로 무엇이 가장 좋을까 뮤지엄측과 지속해서 대화하며, 다양한 아이디어가 순환할 수 있게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면서 "기억과 인지가 소실되어가는 과정 속 현실의 급변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둡고 폐쇄된 원형 극장 같은 공간에서 회화 연작과 향수를 자극하는 멜로디(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와 함께 작품을 선보인다. 기억이 점점 소실되어 가는 초현실적인 그림은 부드러운 조명으로 인해 영상을 보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전한다.
그는 "결국 누군가 인지 저하를 겪게 되면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은 남은 가족들로, 지금까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런 느낌을 진지하고 약간 암울한 느낌의 공간으로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흑백 사진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뭉클함을 전하는 사진 작가 셰릴 세인트 온지는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와 함께 만든 작품을 아름다운 제주에서 선보일 수 있어 영광"이라며 환한 모습을 보였다.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된 제 작품을 보며 새로운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고, 엄마와 함께 한 내 작품을 보면 기운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는다"며 흡족해했다.
쉐릴 세인트 온지의 어머니는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 받았다. 농장에서 수십 년 간 함께 살아온 모녀가 공유하던 추억과 감정은 어머니의 기억과 함께 점점 상실되어 가는 듯해 작가는 사진 작업을 중단했다. 그러다 나른한 햇살이 창에 스며드는 어느 날 오후에 문득 작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변했다. 어머니의 삶 속에서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들을 포착하기로 결심했다. 작가가 아이폰과 대형 카메라로 담아낸 어머니 모습은 장난꾸러기 아이 같고, 수줍은 소녀 같기도 한 노인의 모습이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됐다.
김희영 총괄 디렉터는 "초고령화 사회에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 저하증이 처참한 질병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전시를 기획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교차되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아름다운 날들을 함께 그려갈 수 있기를 소망 한다"고 전했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에 이어 2층에서 보너스 같은 전시도 펼친다. 포도뮤지엄 새 프로젝트인 '아카 인 포도'를 진행, 김지영·강서경의 작품을 전시했다. 예술을 통한 지역적 경계를 넘는 대화와 연결의 장을 추구, 아시아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소개할 예정이다. 전시는 20일부터 1년 간 열린다.
◆제주 포도뮤지엄은?
제주 안덕면에 위치한 포도뮤지엄은 겉으로 작아보이지만 내부는 길게 이어진 대형 전시장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동거인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이 총괄 디렉터를 맡아 2021년 4월 개관했다.
미래의 가치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다목적 공간을 표방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 가운데서 주제를 선정해,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나누고 타인의 입장에 공감해 보자는 취지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전시에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고, 현대미술을 보다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게 해 여행객들의 '제주 핫플'로 부상했다.
2021년 4월 개관전인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12만 명이 관람하며 입소문을 탔다. 군중 심리에 선동이 가미 되었을 때 혐오가 탄생하는 해악성을 탄탄한 구성으로 풀어내 호평 받았다.
2022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빠’로 관람해 화제가 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전시는 이주민과 소수를 향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드러내며 이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고 공감해 볼 것을 제안했다. 포도뮤지엄 소장품인 세계적인 인기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27명의 광대가 등장하는 설치 작품을 전시해 특히 주목 받았다. 당시 7월 초 종료 예정이었던 전시를 연장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2개월 연장과 무료 개방을 하기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