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주연 기자 = "연습을 하다 보면 아침 막장 드라마 같은 느낌을 받아요. 처절하죠. 전쟁터 같은 연습을 하고 있어요."(욘역 이남희 배우)
"거의 다 왔습니다. 배우분들이 워낙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어요. 배우가 지적하면 자연스럽게 고치게 되죠. 작품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해왔습니다."(고선웅 연출)
지난 11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3층에 자리잡은 서울시극단 연습실이 배우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문과 소파, 옷걸이 등 몇 가지의 소품이 있을 뿐이지만 배우들은 이곳에서 헨리크 입센의 거대한 세계를 구현해냈다.
서울시극단이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 위치한 연극 '욘, John' 연습을 공개했다. 고성웅 연출과 배우 이남희·정아미·이주영·김신기·정원조·최나라·이승우·엄예지 등 출연진들은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개막을 앞두고 뜨겁고 치열한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욘은 '인형의 집' 등 23편의 희곡을 발표, 근대극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이다. 젊은 시절 누렸던 부와 명예를 한 순간에 잃고 병든 늑대처럼 8년간 칩거해 온 남자 '욘'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충돌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고독을 극적으로 그린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에서 은행가로 출세했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8년간 감옥에 수감되고, 이후 다시 8년간 집 2층에 칩거해온 아버지 '욘', 어머니 '귀닐', 이모 '엘라'는 모두 아들 '엘하르트'에게 집착한다.
이유는 각각 다르다. 욘은 권위를 위해, 귀닐은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이모 엘라는 실패한 옛사랑을 보상받기 위해 엘하르트를 놓고 쟁탈전을 벌인다. 이들의 모습은 치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다.
고선웅 연출은 "처음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읽었을 때 감동받아 울었다"며 "이 작품을 혼자 알고 싶지 않아 무대에 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입센이라는 대가의 작품을 하다 보니 초반에 그 권위에 짓눌렸던 것 같다"며 "연습을 시작하고 배우들의 의견을 들어가며 고치다보니 작품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해왔다"고 설명했다.
"배우들이 뭔가 질문했을 때 제가 바로 답변을 못하면 쳐내고, 컨펌받고, 고치고 했습니다. 쉬운 연극을 만들고 싶었고, 배우들과 소통하며 수정하다 보니 대본도 1시간 45분~2시간 가량으로 줄었고, 속도감도 빨라졌어요."
고 연출은 "연극이 어려우면 소수에게 희소가치가 있는 쾌락일 수 있지만 대다수에게는 고통이 된다"며 "이런 기운이 극장에 돌면 배우까지 영향을 받는데 그렇기 때문에 쉬운 게 좋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쉽기만 해서는 안 된다"며 "미학적으로나 표현의 측면에서 고심을 많이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욘'역을 맡은 배우 이남희는 "밖에서 겪는 싸움과 가족과의 싸움은 다르다"며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일텐데 이 작품에서 그런 것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어 "100년이 넘은 입센의 작품이지만 현실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며 "어느 곳에, 어느 시대에 있어도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 같다. 당시 우리 TV드라마 같은 대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이남희는 "욘에게는 한국 남자의 가부장적 권력, 허상적인 면이 녹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희노애락을 다 겪은 이 인간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이 많았다"며 "결국 '캐릭터를 파괴하자'는 생각을 했고, 덧씌워진 허상을 파괴하며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욘의 아내 '귀닐'역을 맡은 배우 이주영은 "귀닐은 욘이 감옥에 간 8년, 골방에 칩거한 8년을 함께 겪은 여자"라며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시대였고,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왔고 자신의 재산도 없어 언니에게 기생하고 있는, 내 것이 하나도 없는, 전혀 독립적이지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귀닐은 권력·명예를 가져봤던 인물이기 때문에 이를 버리기 어렵고, 그래서 더 아들에게 집착한다"며 "다만 이 작품에서 귀닐은 큰 변화를 겪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소개했다.
'엘라'역의 정아미는 "주변에 결혼을 안 하고, 조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을 모델로 삼았다"며 "캐릭터의 매력을 만들기 위해 모자란 듯 하지만 동정심이 가고, 유머가 있는 연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연습 초반에는 각을 잡고 연기했지만 연출의 지시에 따라 하다보니 마치 '닭싸움' 같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나름의 재미가 있다"며 "관객들도 그런 부분을 재미있게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엘하르트역의 이승우는 "엘하르트는 수식어가 많은 인물"이라며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조카, 무엇을 해야 하는 인물인데, 막상 자신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며 "대본을 받고 작품에 들어가니 저도 그 시기에 겪은 비슷한 추억, 흔적, 상처가 있더라"며 "그런 부분들을 끄집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무엇을 하는 지가 정체성이 되는 세상"이라며 "어릴 때부터 '커서 뭘하고 싶니', '뭐가 되고 싶니'라는 말을 듣고,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데,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무엇을 즐기고 싶은 지를 찾는 이들에게 울림이 있는 연극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3월29일~4월21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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