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새벽 남구로·양천 인근 인력시장
체감 -10도 강추위에도 300여명 몰려
3분의1만 선택돼…나머진 발길 돌려
"일주일에 이틀만 일해도 괜찮은 편"
"인건비 싼 중국인에 일자리 밀리기도"
[서울=뉴시스]박광온 오정우 기자 = 새벽 5시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 삼거리 인력시장. 기온 -7.6도, 체감온도 -10.4도의 강추위에도 일용직 근로자 300여명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장갑과 방한용 마스크, 귀마개로 중무장을 한 채 모여 있었다.
지난 8일 뉴시스가 찾은 서울 일대 인력 시장서 만난 근로자들은 하얀 입김이 절로 새어 나올 정도의 칼바람 속에 몸을 움츠리거나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일부는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버티기 위해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엔 일할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일거리를 얻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체념이 더 짙게 배어있었다.
오전 4시30분부터 나와 대기하고 있다는 박모(65)씨는 "건설 경기가 워낙 안 좋으니 일자리가 없어 이렇게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일주일에 이틀 정도만 일해도 괜찮은 상황이다. 대부분 이렇게 모여있다 허탕 치고 돌아가기 일쑤"라고 말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던 최영걸(57)씨는 "오전 4시부터 나와 있었는데, 아직 일자리를 못 구했다"며 "겨울이라 일거리가 적기도 하고, 부동산 시장도 지금 너무 혹한기라서 공사를 하는 곳이 적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거리가 없으니까 가족들만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있는 인력시장도 상황은 비슷했다. 오전 5시께부터 일거리를 찾아 모여든 노동자들은 구청이 쳐놓은 '추위 쉼터' 천막 안 난로 앞에서 모여 몸을 녹이고 있었다. 대부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하염없는 기다림만 이어졌다.
20년간 건설 현장을 누볐다는 노태운(64)씨는 보통 일자리를 얻는다면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평균 11시간을 일해 한 달에 약 22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다만 주 5일을 온전히 일하는 주는 많이 없어 월 200만원도 못 가져가는 때도 많다고 덧붙였다.
노씨는 "그렇게라도 벌어야 우리 자녀들한테 생활비를 보태줄 수 있다"며 "그런데 지금 경기가 안 좋으니 일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해에는 경기가 좋아지길 소망할 뿐"이라고 한숨 쉬었다.
이처럼 건설현장 일용직들이 공 치는 날이 많아진 것은 최근 고금리 기조에 건설사에 대한 대출 축소,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자금난이 겹치면서 건설 경기가 얼어붙어서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1~3분기(1~9월) 전국 건축 인허가 현황을 집계한 결과, 착공 건축물은 11만4743동으로 2022년 같은 기간(15만4507동) 대비 25.7% 감소했다.
특히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아파트 등 주택 착공 물량은 지난해 전국 23만1549가구(예정 물량 포함)였다. 상반기 분양 실적은 7만4723가구로 2022년(16만5436가구) 같은 기간 대비 45% 수준에 그쳤다.
미분양으로 인한 자금흐름 악화와 원자재 가격 및 인건비 인상 등에 따른 분양가 상승 압력이 커짐에 따라 건설사들의 분양 지연 사례가 늘어난 영향도 크다.
남구로역 삼거리에 있는 한 인력사무소 관계자는 "현재 전체적으로 건설 경기가 많이 힘들다. 공사 수주도 안 되고 있고 일할 수 있는 현장 자체가 없는 실정"이라며 "특히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건설 계획 사업성과 장래 현금흐름을 보고 대출해 주는 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소규모 현장 공사도 중단돼 수요와 공급 불균형이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싼 외국인 노동자가 공사 현장에 몰리는 것도 새벽 인력시장을 나온 일용직들이 허탕을 치게 하는 한 요소다.
27년 동안 일용직에 종사했다는 전모씨는 "여기 일자리 구하려는 사람들 80% 이상은 중국인들인데, 문제는 이 사람들 대부분이 여행 비자로 들어와 3개월 정도 일하다 다시 들어가고, 또 비자 받아 들어와서 일한다"며 "일당도 우리보다 7~8만원까지 싸게 받으니까 밀릴 수밖에 없다"라고 토로했다.
여기에 올해 건설경기가 지난해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정부는 지난해 2.7% 늘어났던 건설투자가 올해는 1.2%포인트 뒷걸음질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남구로역 인력시장에 몰린 일용직 근로자 300여명 중 일자리를 잡은 건 3분의 1에 그쳤다. 끝내 허탕을 친 이들은 찬 바람을 맞아 빨개진 얼굴로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 2시간 동안 기다렸다는 주모(62)씨는 "이번 겨울이 너무 춥다"며 "가족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니까. 인생이 조금 더 나아질 거라 믿고 살 수밖에 없죠"라고 말한 뒤 오전 6시3분께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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