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④영화 '기생충' 방불…이주노동자 니르말씨의 겨울나기

기사등록 2024/01/08 07:00:00

5일 경기 포천시 채소 농업 단지 현장 방문

노동자 여전히 비닐하우스 내 가건물 거주

화재 위험에 유일한 난방 기구도 못 쓰기도

노동부, 주거시설 대책…현장은 "실효성 無"

'숙소 미제공' 명시 후 가건물에 거주시켜

"주종 만드는 고용허가제 손질이 근본 해법"

[포천=뉴시스] 임철휘 기자 = 기온이 0도 안팎까지 떨어진 지난 5일 오후 경기 포천시의 채소 농업 단지에 있는 이주노동자가 이용하는 화장실. 3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이 화장실을 이용한다. 2024.01.05. fe@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포천=뉴시스]임철휘 기자 = 영하의 추위가 찾아온 지난 5일 오후 경기 포천시의 채소 농업 단지. 들판에 펼쳐진 수백동의 투명한 비닐하우스  사이사이에 검은 차광막을 씌운 비닐하우스가 점처럼 박혀 있었다.

이 중 한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하얀 조립식 패널로 만든 가건물이 보였다. 2022년 8월 한국에 온 네팔 이주노동자 니르말(30·가명)씨가 영하의 기온에도 이 가건물에 살고 있었다.

5일 뉴시스 취재진이 찾은 경기 포천의 채소 농업 단지 일대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 안에 조립식 패널을 얼기설기 세워서 만든 가건물이나 컨테이너에 기거하고 있었다.

지난 2020년 12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영하 18도 한파 속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이후 합법적인 새 기숙사가 마련되기도 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뉴시스와 만난 니르말이 보여준 방은 3평 남짓 돼보였다. 난방 시설이라고는 낡은 온열기 한 대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화재 위험에 한밤중에는 켜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온열기를) 못 쓴다. 불날 수 있다. (불) 많이 난다"며 서툰 한국말로 연신 "춥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기를 막으려고 방바닥에는 장판이 두 겹으로 깔려 있었지만, 바닥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창문은 군데군데 깨져 검은색 천을 임시방편으로 덮어 놓았다. 방 한쪽 구석에는 휴대용 가스버너와 내용물이 반쯤 남은 우유 페트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체온을 올리기 위해 매일 자기 전 우유를 끓여 먹는다고 한다.

[포천=뉴시스] 임철휘 기자 = 기온이 0도 안팎까지 떨어진 지난 5일 오후 경기 포천시의 채소 농업 단지에 있는 한 가건물 앞에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니르말(30·가명)씨가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4.01.05. fe@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비슷한 시간 다른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 안에는 일을 마치고 온 팔레스타인 출신 이주노동자 사이드(39·가명)씨와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남성 2명이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이 쉬고 있던 방 역시 냉골이었다. 천장은 녹슬고 부서졌으며 에어컨 필터에는 먼지가 새까맣게 껴 있었다. 창문은 군데군데 깨져 하얀색 종이로 막혀 있었다.

9년째 이곳에서 일했다는 사이드씨는 "우리 방에는 보일러가 있다.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한다"며 다른 곳에 비해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속헹씨 사고가 발생하고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 도마 위에 오르자 지난해 겨울 농장주가 설치해 줬다고 한다.

실제 대부분의 비닐하우스 숙소가 바깥에 재래식 화장실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이곳은 비닐하우스 내부에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차광막 때문에 빛이 들지 않는 데다 환기 시설도 없어 곰팡이와 물때가 가득한 화장실은 여전히 열악한 모습이었다.

[포천=뉴시스] 임철휘 기자 = 지난 5일 오후 경기 포천시의 채소 농업 단지에 있는 한 비닐하우스 내부에 이곳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빨래들이 널려 있다. 2024.01.05. fe@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용노동부는 지난 2021년 1월 농·어업 분야 이주노동자 주거시설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사업장이 불법 가건물을 이주노동자에게 숙소로 제공하면 신규 고용 허가를 내주지 않고, 현장 점검을 통해 열악한 주거시설을 관리·감독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기존 사업장에서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 조립식 패널 등을 숙소로 이용하는 이주노동자는 희망에 따라 고용노동부 직권으로 사업장 변경을 허용키로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책에도 상당수 사업장은 이주노동자에게 기숙사를 제공할 의무가 없는 현행 고용허가제를 통해 불법 가건물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근로계약서에 '기숙사 미제공'을 명시한 후 고용허가를 받아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는 사례도 늘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는 "고용주가 이주 노동자에게 기숙사를 제공할 의무 조항이 없으니까 '기숙사 미제공'으로 고용허가를 받은 후 불법 기숙사에 기거하게 하는 게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며 "고용주들은 (이주노동자에게) '어디 갈 데 없으면 그냥 여기서 지내'라면서 사용료 명목으로 20만원씩을 월급에서 공제하고 있다"고 했다.

언어적 한계가 명백하고 인적 네트워크가 없다시피 해 자력으로 집 구할 능력이 안 되는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악용한다는 것이다.

[포천=뉴시스] 임철휘 기자 = 사진은 숙소 '미제공'가 명시돼 있는 근로계약서(사진=포천이주민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 제공) 2024.01.0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결국 정부의 부실한 관리·감독이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가 유지되는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김 목사는 "근로계약서에 '빌라 제공'이라고 했으면 고용허가 후에 이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당국은 사진을 찍어내라고 하든지, 임차계약서를 내라고 한다든지 하는 최소한의 확인도 하지 않는다"며 "경기 북부에서 고용허가 후 사후 점검을 한 사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전에 엄격한 심사도 하지 않고 사후에 단속 관리 감독도 거의 하지 않으니 이런 열악한 주거 환경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김 목사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현행 고용허가제를 손질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선택과 변경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주에게 주거환경 개선을 요구하지 못하거나, 요구해도 무시되는 사례가 번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판 노예제라 불리는 고용허가제를 노동허가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며 "고용주와 이주노동자 사이를 철저한 주종관계로 만들고 일터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고용허가제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지난 2021년 고용노동부 연구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의 70% 이상이 컨테이너 등 가설건축물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포천=뉴시스] 임철휘 기자 = 지난 5일 오후 포천이주민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가 경기 포천시의 한 카페에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4.01.05. fe@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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