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래도 채권시장 어려운데"…증권사들, 태영 사태에 채권 랩 환매 난항

기사등록 2024/01/05 10:58:17 최종수정 2024/01/05 12:15:28

랩·신탁 돌려막기 적발된 9개사

고객 환매해줘야 하는데…"제 값에 팔 수가 없다"

칼 빼든 당국에 업계 호소도…"불건전 관행 계속될 순 없어" 지적


[서울=뉴시스]우연수 기자 = 관행처럼 퍼져있던 채권·랩 신탁 돌려막기 행태에 금융감독원이 칼을 빼들자 증권업계가 뒤숭숭하다. 언젠간 터졌을 일이란 반성의 목소리와 억울함의 호소가 뒤섞여 나오는 가운데, 당장 금융당국이 말하는 '객관적인 가격 산정 등을 통한 환매'를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 먼저 고객에게 손해배상을 해줘야 할지 등 현실적 고민이 가장 크다.

특히 업계에선 고객에게 환매 해주려면 계좌 내 채권을 팔아야 하는데, 최근 태영건설 사태가 트리거가 되며 시장에 채권을 제값에 사갈 수요가 없다고 난색을 표하고 있다. 또 당국의 매서운 검사 영향에 저등급 채권을 흡수하던 증권사의 '시장 버퍼(완충)' 역할이 약해질 경우 시장에의 영향이 적지 않을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4일 업계에 따르면 금융투자협회는 채권 랩·신탁을 위법적으로 운용한 증권사들에게 지난해 말 환매 가이드라인을 전달했다.

이는 앞서 지난달 15일 발표된 금감원 방침에 대한 후속 조치다. 금감원은 9개(하나·KB·한국투자·유진투자·SK·교보·키움·NH투자·미래에셋) 증권사들의 채권형 랩·신탁 운용 행태 검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증권사 위법으로 손실이 발생한 계좌에 대해 적절히 환매 조치할 수 있도록 하라고 안내했다.

또 "운용상 위법 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계좌에 대해 금투협회와 증권업계가 협의해 객관적인 가격 산정 및 적법한 손해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증권사 위법으로 일부 고객 계좌에서 손실이 발생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감원은 특정 고객의 랩·신탁 계좌로 기업어음(CP) 등을 고가 매수해주는 방식으로 증권사가 제3자에게 손실을 전가했다고 봤다. 예를 들어 한 증권사는 총 6000여회의 연계·교체거래를 통해 특정 고객 계좌의 CP를 다른 고객의 계좌로 고가 매도해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 전가했다.

채권 금리가 급등한 시기, 만기가 먼저 도래한 고객들의 수익률을 위법하게 보전해주고 그 손실을 만기가 좀 더 늦은 계좌로 돌린 것이다.

금감원이 파악한 증권사별 손실 전가 금액은 수백에서 수천억원 규모다.

위법을 모두 인정하고 손실을 배상할 것이 아니라면, 증권사들은 채권의 정상적인 매각을 통해 랩·신탁을 고객에게 잘 환매해주는 것이 최선인 상황이다.

하지만 업계에선 지금의 시장에서 채권을 제값에 팔기 어렵다는 성토가 나온다. 고객에게 환매 해주려면 계좌 내 채권을 팔아야 하는데, 채권 시장 경색이 이어지고 있어 시장에 수요가 없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이 같은 상황에 금투협은 증권사들에게 "반드시 민평금리가 아니더라도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공정가액으로 환매액 산정이 가능하니 각사가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해 개별 계약 내용에 따라 대응하라"고 안내했다.

채권은 다수의 호가로 가격이 형성되는 상장 주식과 달리 장외에서 일대일 거래되기 때문에 평가 금리와 실제 거래 금리가 다르단 특징이 있다. 같은 기업어음(CP)라 해도 최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화 우려로 유동성이 급감한 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등은 더 높은 금리에 거래되기도 하며, 채권 퀄리티에 따라 아예 수요가 없는 일도 다반사다.

오랫동안 채권 거래를 해 온 한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금리가 내려가는 경기긴 하지만 태영건설 사태 이후 저등급 캐피탈채, PF 관련 채권, 장기채들은 사려는 수요가 크지 않아 시장에서 평가되는 것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팔아야 할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증권사들이 지금까지 못팔고 자전·교체거래 등으로 막았단 얘기는 보유 종목이 우량한 채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금감원 검사 후폭풍으로 업계에 일종의 '펀드런'처럼 단기자금 시장에 증권사발(發) 공급이 쏟아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일각에선 제기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그간 CP를 흡수하는 건 대부분 증권사였는데, 동시다발적으로 출회가 나오면 수요는 없고 공급만 나오는 시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같은 업계 우려에 대한 비판의 시각도 있다. 레고랜드 등 특수한 상황일지라도 수익률 보전을 위한 고가 돌려막기, 파킹·자전거래 관행이 적정했다고 할 순 없단 것이다.

한 운용업계 관계자는 "그만큼 증권업계에서 적정 금리가 아닌 가격에 계속 돌려왔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며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계속 할 순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금융당국 관계자 역시 "증권사들이 주요 플레이어였다 해도 정말 자금 공급이 필요한 채권을 다 받아준 것도 아니고, 평소 잘못된 관행 안고치다 연말에 유동성 문제만 생기면 이런 성토가 나오는 것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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