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에 철당간 한쪽으로 휘어져
나무 목심 대신 철근에 시멘트 채워 일직선 유지·관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장(銅檣)', 구리 돛대로 지칭
4일 충북도와 청주시에 따르면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용두사지 철당간은 1962년 12월 국보 41호로 지정됐다.
이 철당간 아래에서 세 번째 철통(鐵筒) 표면에 양각된 용두사철당기(龍頭寺鐵幢記)에는 국내 당간 가운데 유일하게 주조 시기가 적혀 있다. 국보로 지정된 이유다.
'維峻豊三年 太歲壬戌三月二十九日鑄成(준풍 3년 임술년 2월 29일 주조해 완성했다.)'
준풍은 고려 광종의 연호다. 준풍 3년은 광종 13년, 즉 서기 962년에 해당한다.
이 같은 정확한 조성연대는 당간과 지주 양식을 파악하는 데 기준이 돼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고적 조에도 용두사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서는 철당간을 '동장(銅檣·구리 돛대)'으로 지칭했다.
절은 폐사했지만, 남아 있는 철당간 높이는 10여 길(丈)이라고 했다. 1길은 현재 도량형으로 2.4~3m다.
철당기에는 철통이 30단이고 높이는 60척이란 기록이 있다.
현재 남은 20단의 높이가 12.7m이고, 당(幢·깃발)을 쉽게 달도록 한 용머리가 꼭대기에 있어 건립 당시 높이는 족히 20m는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을 전후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이 눈길을 끈다.
정확한 촬영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유리건판(유리판에 감광제를 바른 흑백필름 원형) 사진의 용두사지 철당간은 한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1933년에 촬영한 다른 유리건판 사진에는 곧게 세워져 있다. 앞서 복원하면서 바로 잡았다.
철당간 철통 속 공간에는 나무로 목심을 박았던 것이 시간이 흘러 썩어 부러지면서 당간이 자연스레 한쪽으로 구부러졌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본다.
일제는 1915년 전후해 조선고적조사를 하면서 용두사지 철당간에 주목했다.
학계 한 관계자는 "당시 기술로선 철근을 박고 거기에 시멘트를 채우는 게 아마도 최선의 방안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멘트를 털어내려고 해도 철당간 훼손 우려가 있어서 지금도 그대로 둔 상태에서 표면 보존 처리를 한다.
엄기표 단국대 교수의 '충북지역 당간과 당간지주' 논문에 따르면 철당간은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하면서 상당 부분 훼손됐다고 전한다. 그 뒤 1907년 재건됐고, 1927년과 1957년에 이어 1972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다.
연대 미상의 유리건판 사진 속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또 있다. 철당간 앞에 쌓은 석축이 인근의 허물어진 청주읍성 성돌로 보인다.
용두사는 조선시대 청주목과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을 지키고자 축조한 청주읍성 안에 있다. 마치 배의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재난을 피했다고 해서 청주를 주성(舟城)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ksw64@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