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한국 근대 등반을 대표하는 오래된 사진 1장이 있다. 때는 1940년 11월 3일 춥고 흐렸다. 장소는 인수봉 정상.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국적과 이름을 알 수 없는 58명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곁눈질하면서 만나서 점심을 먹고 재빨리 하강했으며, 약속한 듯 아무도 이 등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책 '침묵하는 산'(한길사)은 일제강점기 산에 오른 사람들은 누구였고, 일제는 왜 등행을 장려했는지 그 이유를 파헤친다.
저자는 이 사진이 기록을 넘어 삶의 역사적 풍경을 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산행에는 일제강점기 역사와 제국주의가 산에 가한 폭력, 재조 일본인의 풀뿌리 식민 지배 활동, 조선 산악인의 정체성과 친일 문제 등을 보여준다.
이 책은 등행은 일제의 선전 스펙터클이었으며, 철도는 제국주의 세력 확장의 지름길이었음을 분석한다.
조선산악회 회장이었던 나카무라 료조는 금강산 탐승시설조사위원회 위원이었다. 금강산, 백두산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한 철도 개설은 1899년 일본 제국주의가 획득한 경인철도 부설권으로 시작됐다.
조선총독부는 황국 신민화를 위한 체력 증진을 내세워 등행과 등산을 적극 장려했다. 수많은 학교 등산부가 황민화를 목적으로 산에 올랐던 것이다. 철도 건설은 조선을 수탈하는 일제의 광포한 폭력이었다.
저자는 당시 산악인 김정태(1916-88)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는 일본인 중심의 조선산악회에 가입해 가장 왕성하게 등반 활동을 했다.
1942년부터 해방 때까지 김정태라는 이름을 버리고 '타츠미 야스오'란 이름으로 일제 등반 행사를 주도했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열한 번 국토구명사업에 참여하고, 일제강점기 등반 업적을 기반으로 한국 근대 산악계의 태산준령으로 우뚝 섰던 산악인이다.
저자는 김정태가 남긴 글과 그가 쓴 '천지의 흰눈을 밟으며'를 재평가한다. 식민지 수탈 역사부터 철도 개발, 문화 정책, 친일 기업 등에 대한 한국·일본의 자료들을 새로운 근거로 종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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