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올림픽 선발전 탈락 딛고 세계선수권 銀
"안 좋은 일 생겨도 다시 행복해질 거라 믿어요"
이해인(18·세화여고)이 슬럼프에도,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선발전 탈락 충격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이해인은 지난달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202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자 싱글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 메달을 딴 것은 이해인이 '피겨여왕' 김연아 이후 10년 만에 역대 두 번째다.
대회를 마치고 지난달 27일 귀국한 이해인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23 ISU 피겨스케이팅 팀 트로피 대회(4월 13~16일 일본 도쿄)에 출전하게 돼 쉴 틈 없이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이해인은 틈틈이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고 있다.
뉴시스와 만난 지난 3일에도 서울 노원구 태릉빙상장에서 훈련에 한창이었던 이해인은 "세계선수권을 마치고 살아온 중에 가장 많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다녀온 이후 인터뷰를 많이 했다. 이렇게 인터뷰를 많이 한 것이 처음이라 신기하고 색다르다. 그래도 내가 뭔가 잘 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 "엄마, 아빠뿐 아니라 4살 많은 언니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엄마가 내색을 많이 하시지 않고, 차분하신 성격인데 메달을 딴 후 문자 메시지를 엄청 많이 보내셨다. 엄마가 행복해하니까 좋았다"고 덧붙였다.
◆더 힘든 순간도 있었기에…베이징올림픽 선발전 탈락도 이겨냈다
2021~2022시즌 이해인은 베이징올림픽 선발전 탈락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2021 ISU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위를 차지해 한국 여자 싱글 올림픽 쿼터를 2장으로 늘리는 데 앞장선 이해인은 그해 12월 열린 베이징동계올림픽 선발전 1차 대회에서 컨디션 난조 속에 6위에 그쳤다. 2차 대회에서도 벌어진 격차를 만회하지 못한 이해인은 결국 베이징올림픽 출전권을 놓쳤다.
이해인은 "솔직히 베이징올림픽 선발전이 끝나고 울었다. 올림픽에 못 나갔다는 사실보다 그때까지 해당 시즌에 한 번도 클린 연기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책하면서 울었다"고 털어놨다.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속상함은 오히려 금방 털었다. 그는 "1차 선발전을 마친 뒤 점수 차가 많이 벌어졌다. 2차 선발전을 앞두고는 만회해서 베이징올림픽 출전권을 따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3위 내에라도 들어보자는 생각만 했다"고 했다.
이해인은 "주변에서 베이징올림픽 선발전 때가 제일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하시는데 사실 제 피겨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2020년이었다"고 말했다.
당시는 이해인이 주니어 생활을 마치고 시니어 데뷔를 앞뒀을 때다. 2020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쇼트프로그램 2위에 오르고도 최종 5위에 그쳐 메달을 놓쳤던 이해인은 2020~2021시즌을 준비하면서 온갖 악재를 만났다. 키가 자라면서 잃은 점프 감각을 다시 찾아야 했고, 역류성 식도염에 복숭아뼈 부상까지 겹쳤다.
이해인은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한 것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점프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었다. 뛰면 실려갈 것 같은 느낌도 들어서 점프를 뛰지 못하고 1시간 동안 빙판에 서 있었던 적도 있다"며 "앉아서 자야할 정도로 역류성 식도염이 심해서 체중이 3~4㎏ 빠졌고, 근육이 줄었다. 복숭아 뼈에 물이 차는 부상이 생긴 것도 그때였다"고 회상했다.
거듭된 악재를 이겨낸 경험은 이해인에게 약이 됐다. 이해인은 "그때의 경험이 있어서 베이징올림픽 선발전 때도, 이번 시즌에도 힘들었던 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해인의 긍정 마인드…"저를 진심으로 믿어줄 사람은 저 뿐"
2022~2023시즌 초반도 녹록치 않았다. 시즌 초반 독감에 걸리면서 대회에 기권할 뻔했고, 2022~2023시즌 두 차례 ISU 그랑프리 시리즈에서도 모두 4위에 그쳐 아쉽게 메달을 놓쳤다. 이해인은 "'4'라는 숫자가 그렇게 싫더라"고 농담했다.
시즌 초반 힘겨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 본인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해인은 "'내가 다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노력을 하면 다 된다는 마음이었는데, 이번 시즌 초반에는 '노력을 해도 안되는 것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해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격려 속에 긍정적인 마음을 되찾았다.
이해인은 "제가 멘털이 단단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긍정적이기는 하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고,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기 보단 '이런 일을 겪을 운명이었고 다시 행복해지려나보다'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즌 초반 힘들 때 새로 사귄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고, (경)재석, (이)시형, (차)준환오빠가 응원해줬다. (김)예림언니도 많이 조언해줬다. (김)채연이가 열심히 해서 자극도 됐다"며 "그래서 다시 힘을 냈다. 4대륙선수권대회와 세계선수권에서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해인은 "세계선수권 은메달로 나에 대한 의심을 떨치고, 나를 다시 진심으로 믿어주기로 했다. 진심으로 나를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강조했다.
◆김연아는 '그저 고마운 존재'
4대륙선수권을 마치고 "연아언니는 영원한 나의 롤 모델"이라고 말했던 이해인에게 '김연아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잠시 고민하던 이해인은 "고마운 존재"라는 답을 내놨다.
김연아가 2013년 아이스쇼에서 트리플 토루프를 뛰는 모습을 보고 본격적인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는 이해인은 "스케이트를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연아언니의 모습을 보고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연아언니가 없었다면 제가 피겨를 몰랐을 것이고,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제 인생에 있어 직업으로 삼을 만한 것을 빨리 찾지 못했을 것"이라며 "언니가 있었기에 한국 피겨도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운 존재"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김연아가 피겨를 시작하게 해준 존재라면, 유영은 꿈을 키워준 존재다. 2020년 4대륙선수권에서 유영이 은메달을 따는 모습은 이해인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이해인은 "원래는 4대륙선수권, 세계선수권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0년 영이언니가 은메달을 따는 모습을 직접 보고는 나중에 나도 메달을 따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돌아봤다.
◆빙판 밖에선 그림·춤 좋아하는 '소녀'
빙판 밖의 이해인은 그림과 춤을 유독 좋아하는 소녀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이해인의 힘든 시기를 위로해준 것도 그림이었다. 주로 인물화를 그리는데 2년 전부터는 해당 인물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세계선수권에서도 미국의 신성 일리아 말리닌(미국)의 그림을 그려서 선물했다.
만화를 보는 것도 좋아한다. 스튜디오 지브리(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데, 최근에는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일본 선수와 친해지고자 보면서 일본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해인은 "말하고 싶은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외워갔다.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딴)사카모토 가오리 언니에게 일본어로 '당신은 최고의 스케이터입니다'라고 말해줬다. 무척 좋아해주더라"고 전했다.
춤을 추는 것도 이해인의 취미 중 하나다. 최근 갈라 프로그램 곡으로 쓴 레이브걸스의 '롤린', 아이브의 '애프터 라이크'도 이해인이 춤 출 때 듣는 곡이다.
이해인은 "아침을 먹은 뒤 춤을 추고, 집에서 자기 전에도 춘다.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운동은 하기 싫을 때 춤을 춘다"며 "그래서 신나는 곡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갈라 프로그램에 K-팝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최근 K-팝이 인기가 있고, 한국인으로서 더 알리고 싶었다. 다른 분들이 보셨을 때 신나는 갈라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서 K-팝을 택했다"며 "앞으로도 한동안은 서정적인 곡보다 신나는 K-팝을 갈라 프로그램 곡으로 쓸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해인의 꿈 "별똥별 아닌 계속 떠 있는 별이 될래요"
이해인은 "이번 시즌을 시작하기 전 트리플 악셀을 연습했다. 4대륙선수권에 나가기 전 몇 달 만에 뛰었는데 나쁘지 않았다"며 "5번을 뛰면 3번은 착지를 한다. 팀 트로피를 마치면 열심히 연습해서 다음 시즌에는 1개 이상 뛰고 싶다"고 말했다.
3년 뒤에는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이 기다리고 있다.
베이징 때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한 이해인이 욕심을 낼 법도 하지만, 아직은 신경쓰지 않고 있다.
이해인은 "올림픽도 큰 무대지만, 그랑프리 시리즈와 4대륙선수권, 세계선수권 등 굵직한 대회가 많다. 일단 눈앞에 놓인 대회를 신경쓰고, 나중에 때가 됐을 때 올림픽에 대해 생각하겠다"면서 "아직은 너무 멀리 있다"고 했다.
다만 상상하는 모습은 있다. 이해인은 "밀라노에서 더 발전된 기술을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을 가끔 상상하기는 한다"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피겨 선수로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얼까. 이해인의 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별똥별 같이 반짝 했던 선수들도 있잖아요. 저는 별똥별보다 계속 떠 있는 별이 됐으면 좋겠어요. 제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싶어요. 나중에 은퇴할 때 사람들이 저를 노력하고, 행복하게 타는 데 잘 했던 선수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공감언론 뉴시스 jinxiju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