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최초 희생자 '구둣공' 김경철 열사
12살 나이로 숨진 '5월의 막내' 전재수 군
진상규명 의지담아 행방불명자 묘소 참배도
전씨는 청각장애인 구둣공이었던 5·18 최초 희생자 고 김경철(당시 24세) 열사와 계엄군 오인 교전에 휘말려 숨진 '5월의 막내' 고 전재수(당시 12세) 군의 묘소, 행방불명자 69명의 영을 기리는 행불자 묘역을 찾는다.
30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전씨는 오는 31일 오전 11시 30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방문한다.
추념탑 앞에서 헌화한 그는 김 열사와 전 군, 행불자 묘소에서 각각 참배할 방침이다.
김 열사는 5·18 당시 집회에 참여해 구호 한마디 외칠 수 없었던 청각장애인이었다.
어렸을 적 뇌막염을 앓아 청각을 잃은 그는 성장해 광주에서 구둣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딸의 100일 잔치를 치른 며칠 뒤인 1980년 5월 18일 가족 모임을 가졌다. 당시 집에 왔던 처남을 광주역에서 배웅한 뒤 귀가하는 길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친구들과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다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7공수여단 소속 계엄군들에게 둘러싸여 매질을 당했다.
그는 신분증을 들어보이며 청각장애인임을 알렸지만 계엄군의 폭력은 그치지 않았다.
머리를 크게 다친 그는 국군통합병원을 거쳐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날인 19일 오전 3시께 숨졌다. 공식으로 기록된 5·18 첫 희생자다.
그의 시신은 상무대에 안치돼있다가 가족들 몰래 서구 화정동 백일사격장에 암매장됐다.
전 군은 1980년 5월 24일 광주 남구 송암동 한 논가에서 친구와 놀던 중 계엄군의 교전에 휘말려 희생당했다.
11공수여단은 당시 송암동에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교도대와 교전을 벌였다.
11공수는 임무를 맞바꾸려고 전교사 교도대가 머물던 송암동 효천삼거리 방면으로 장갑차를 몰았고, 이를 시민군으로 오인한 교도대가 90㎜ 무반동총을 쐈다. 이 과정에 11공수 소속 군인 9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쳤다.
계엄군 사이의 교전을 피하던 재수 군은 벗겨진 고무신을 줍기 위해 몸을 틀던 도중 총탄에 가슴과 배를 맞았다.
전 군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물러날 때까지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상태로 선산에 묻혀있었다. 겨우 치러진 장례식에서는 찍어둔 사진이 없어 영정조차 놓지 못했다.
지난 2021년에서야 유가족이 작고한 아버지의 유품을 찾다가 오래전 찍어둔 가족 사진을 발견하면서 41년 만에 얼굴을 되찾기도 했다.
전씨는 진상규명의 의지를 담아 행방불명자 묘소를 찾을 방침이기도 하다.
현재 5·18민주묘지에는 당시 사라진 행불자 69명의 영을 기리는 비석이 1묘역 한 켠에 마련돼있다.
지난해 12월 기준 5·18 당시 신고된 행불자 수는 총 242명으로 이중 84명이 공식 행불자로 인정된 상태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중 9명(공식 행불자 8명·무명열사 1명)의 유해를 확인했다. 현재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233명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참배 대상자의 유가족은 그의 사과에 감사를 전했다.
전 군의 형 전재룡(63)씨는 "광주 시민들에게 스스럼없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린다면 유족으로서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며 "할아버지가 하지 않은 일을 손자가 대신 한다는 점이 마음 아프다. 진정한 사과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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