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성큼 걸어나가 목청 높이며 당차게 말하는 열일곱 소녀 정년이. 지긋지긋한 조개 팔이와 비린내 나는 가난이 싫다며 집을 뛰쳐나와 매란국극단에 도전장을 내민다.
고향인 목포의 시장에선 깨나 노래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생판 초짜다. 소리도, 연기도, 검술도 모두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국극의 세계에서 천방지축 취급을 당할 뿐이다.
하얀 저고리에 파란 치마를 입은 씩씩한 정년이가 무대로 튀어나왔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는 창극의 가능성을 또 한 번 활짝 열었다. 웹툰을 창극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작품은 1950년대를 풍미한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다. 여성국극은 소리·춤·연기가 어우러진 종합예술로, 여성들이 모든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시작했지만 국극을 통해 꿈을 꾸게 된 정년이를 비롯해 시대의 차별에 맞서며 도전하고 성장하는 여성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웹툰의 큰 줄기를 따르지만 무대에 맞게 변화도 줬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를 다룬 '쌍탑전설'로 끝나는 웹툰과 달리 창극에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인 '자명고'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무대 뒤 벽에 드리워진 천을 커다란 자명고로 구현하며 웅장한 연출적 효과를 선사한다. 어느새 소리가 자신의 전부가 되어버린 정년이는 호동왕자를 맡아 매란국극단의 남역 주역으로 우뚝 선다.
다만 주인공 정년이가 극 후반에 외려 존재감이 덜해 보이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극 초반에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매력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정년이가 성장을 이뤄내고 완성되는 극적인 한방이 꽂히진 않는다. 또 주변 인물은 정년이의 1호 팬인 부용과 라이벌인 영서 정도로 좁혀 서사를 전개하지만 분량상 내용이 축약되다 보니 공감을 끌어내기엔 쉽지 않다.
하지만 초연인 만큼 다듬고 더 발전할 모습이 기대되는 창극이다. 개막 전부터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젊은 여성 관객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것도 주목 받았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여성국극이 극중극으로 짧게 비쳐 그 매력이 좀 더 보였으면 하는 기대도 생긴다.
소리꾼 이자람이 작창·작곡·음악감독을 맡았다. 가야금·거문고·아쟁·피리·대금 등 국악기와 현대적인 건반 선율이 어우러진다. 오는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
◎공감언론 뉴시스 akang@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