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경기 일정은 고무줄?…논란 자초한 WBC

기사등록 2023/03/20 16:29:11
[서울=뉴시스] 김희준 기자 = 내로라 하는 스타들이 총출동해 '야구 월드컵'으로 불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다.

WBC를 주관하는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이 기존에 공개했던 준결승 대진을 슬쩍 바꿔 스스로 논란을 자초했다.

대회를 앞둔 지난 2월 MLB 사무국이 공개한 대진표를 보면 1라운드 A조 1위와 B조 2위의 대결은 8강전 제1경기, B조 1위와 A조 2위의 대결은 제2경기, C조 2위와 D조 1위의 대결은 8강전 제3경기, D조 2위와 C조 1위의 경기는 제4경기였다.

제1경기와 제2경기는 15일과 16일 일본 도쿄돔에서, 제3경기와 제4경기는 미국 현지시간으로 17일과 18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론디포파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8강전 제1경기 승자는 제3경기 승리 팀과 20일에, 제2경기 승리 팀과 제4경기 승자는 21일에 준결승에서 맞붙는 구조였다.

여기에 단서 조항이 있었다. 대회 1라운드 때 WBC는 공식 홈페이지 대진표에 "일본 대표팀이 2라운드에 진출하면 B조 순위와 관계없이 8강 두 번째 경기를 치른다", "미국 대표팀이 2라운드로 진출하면 8강 두 번째 경기를 치른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A, B조는 문제가 없었다. 기존에 발표한대로 A조 1위인 쿠바와 B조 2위인 호주가 15일에, B조 1위인 일본과 A조 2위인 이탈리아가 16일에 일본 도쿄돔에서 8강전을 치렀다.

문제는 C, D조였다.

단서 조항을 따른다면 C조 2위인 미국과 D조 1위인 베네수엘라의 대결이 '두 번째 경기'인 제4경기로, C조 1위인 멕시코와 D조 2위인 푸에르토리코가 제3경기로 편성돼야 했다.

그러나 단서 조항의 해석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두 번째 경기'를 8강전 제2경기와 제4경기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일정상 두 번째 경기로 볼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두 번째 경기를 제4경기로 해석한 반면 MLB사무국은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8강전을 제3경기로 편성하고는 경기 시간만 뒤로 미뤘다.

경기 시간을 뒤로 미룬 것이야 흥행을 고려한 것이라고 쳐도, 본인들이 만든 단서 조항을 무시한 것은 결국 미국 입맛대로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미국이 제4경기에 편성됐을 경우 준결승에서 일본을 만날 수도 있었다. 미국이 준결승에서 일본과 대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진을 수정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질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MLB 사무국이 8강이 시작되면서 공개한 대진표에서는 단서 조항을 슬그머니 지우면서 의혹은 더욱 커졌다.

대회 도중 수정된 대진표뿐만이 아니다. 경기 일정을 봐도 개최국인 미국, 일본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점이 곳곳에 눈에 띈다.

아무리 개최국이고 흥행을 위해서라지만 일본은 이번 대회 1라운드에서 한 번도 낮 12시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반면 중국과 체코는 한 차례씩 오후 7시 경기를 한 다음날 낮 12시 경기를 해야 했다.

또 일본이 9일부터 12일까지 연달아 4경기를 치른 후 8강전까지 충분히 휴식할 수 있도록 1라운드 일정이 짜여졌다는 반응도 나왔다.

미국은 연달아 경기를 치르지 않았으나 낮 12시 경기를 피해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WBC는 MLB 사무국이 야구의 세계화를 꿈꾸며 창설한 대회로, 빅리그에서 뛰는 스타들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회이기도 하다.

MLB 사무국은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주관하는 대회에는 빅리그 선수들의 출전에 제한을 두지만, WBC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

대회를 거듭할수록 MLB 선수들의 참가도 늘고 있어 WBC는 '야구 월드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각국이 빅리거를 포함해 '진검승부'를 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성 훼손에 대한 우려를 낳으면서까지 자신들의 입맛대로 대회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인 점은 스스로 권위를 깎아먹는 부분이다.

코로나19 여파로 2017년 이후 6년 만에 열린 WBC는 앞으로는 주기적으로 개최된다. 다음 대회는 2026년이다.

MLB 사무국이 차기 대회에서도 공정성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입맛대로만 대회를 운영한다면 WBC는 권위를 갖춘 '야구 월드컵'이 아닌 돈벌이 수단이라는 시각을 지울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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