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연극 무대…화가 '마크 로스코' 변신
2019년 공연보고 매료…"대사 한줄한줄 놀라워"
엘칸토 소극장 등 1980년대 활동…데뷔 43년차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대표 화가 마크 로스코는 어두컴컴한 작업실을 처음 찾아온 조수 켄에게 다짜고짜 이 말을 던진다. 그의 말에 가방을 움켜쥐고 벽에 걸린 그림을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던 켄이 답한다. "레드요."
마크 로스코와 가상 인물인 조수 켄의 대화로 이뤄진 연극 '레드'의 첫 장면이다.
30여 년 만에 무대에 올라 마크 로스코로 변신한 배우 유동근은 "이 한마디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가장 고민했던 대사예요. 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싶었죠. 자다가도 '뭐가 보이지?'를 말할 정도였어요."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그는 "어린 아이 같은 심정"이라고 밝혔다.
"천재 화가의 처절하면서도 예술적인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끝까지 대본을 놓을 수 없어요. 대사를 외웠어도 계속 허덕이며 분석하고 있죠. 완벽한 로스코가 될 순 없지만, 그래서 인간적으로 쉽게 다가가려 했어요."
유동근을 무대 위로 불러세운 건 대사의 매력이었다. 이번 공연의 더블캐스트인 정보석의 2019년 공연을 보고 대사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곧장 대본을 구해 읽었다. "이제는 한번 덤벼볼 만하다고 생각해 선택했다"고 밝혔다.
"방송, 영화와 달리 연극의 묘미는 매회 다른 점이에요. 의외성도 큰 매력이죠. 어느 날은 대사를 천천히 해보고, 어느 날은 더 크게 말하기도 해요. 실수는 하지만, 울렁증은 없어요. 공연장에 일찍 와서 캄캄한 무대에서 홀로 생각하죠. 오늘 제게 한번 (연기의 신이) 와달라 염원해요.(웃음)"
대사엔 마크 로스코 내면의 세계가 담겨 있다고 전했다. 원작을 쓴 극작가 존 로건의 이름을 인터뷰 내내 언급하며 탄복했다. "훅 지나가는 짧은 한마디에 섬뜩함이 있다. 함축적인 대사가 굉장히 놀랍고 대단하다"며 "대사 한 줄, 한 줄이 마크 로스코 캐릭터 그 자체를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존 로건 작가만의 기가 막힌 화술이 나와요. 짤막한 대사에 로스코가 가진 광적인 예술성과 예민함, 완벽함이 드러나죠. 켄에게 니체, 프로이트를 읽어봤냐고 묻는 대사로 사상, 철학도 엿볼 수 있어요. 로스코를 통해 인간의 비극에 접근하고 우리 현실에 메시지를 던져요. 끊임없는 불균형 속에 살아가며, 비극을 통해 성장하는 삶을 담아내죠."
방송국 공채에 합격했지만 군사정권 시절 TBC 통폐합으로 인해 설 자리가 없어졌다. 매일 저녁 집 앞 포장마차에서 허탈함을 달래던 청년에게 어느 날 노신사가 차에서 내리며 말을 걸었다. "당시 배역이 없어 속상해하던 제게 방송 작가인 유열 선생님이 엘칸토 소극장을 연결해줬어요. 당시 표도 팔고, 포스터도 붙였죠. 연극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도 했어요. 그때 낙랑공주가 (아내인) 전인화 배우였죠.(1986년 이 작품으로 유동근과 전인화가 처음 만났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무대와 계속 연을 맺을까. 최근 연극 '갈매기'를 연출 및 출연하고 있는 배우 이순재도 그의 공연을 보고 격려해줬다. "선생님이 어려운 배역인데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웠냐고 하더라. 다음에 연극을 하면 같이 하자고 했는데, 제가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고 웃었다.
그는 마크 로스코의 흔적이 흐려질 때까진 다음 작품을 기약할 수 없다고 했다. "마크 로스코가 제게서 달아나지 않았는데 다음 작품을 할 순 없겠죠. 이 공연의 마지막 장을 지우고 작품과 배역이 소각될 때까지가 배우의 수업이에요. 조금씩 조금씩 옅어진다면 그때 생각해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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