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확산·우크라 사태 등으로 식량 공급망 위기
상반기 식량가격지수 147.9p…코로나 이전比 56%↑
주요국 수출 제한 조치에 국내 식료품 가격도 급등
자급률 20% 수준 OECD 꼴찌…의존도 갈수록 커져
경제 위기에 이상 기후 일상화되면 식량 불안 가중
[세종=뉴시스] 오종택 기자 = 감염병 확산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악화된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인한 불안감은 우리 밥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오르기 시작한 국제 곡물가격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급격히 치솟았다. 식량 확보에 불안감을 느낀 주요국들이 식료품 수출 ‘빗장’을 걸어 잠그면서 해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위기감이 확산됐다.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총성 없는 전쟁 속에 한국의 식량안보 지수는 하락세를 거듭하는 등 무방비 상태다. 공급망 위기에 기상 이변 등 기후 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식량 문제는 우리 경제를 주저앉힐 수 있는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국제 곡물가격 코로나 이후 56% 폭등…무기화된 식량
3일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경제연구원(KREI) 등에 따르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조사해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올해 상반기 평균 147.9로 코로나19 발생 직전 해인 2019년 평균 95.0에 비해 55.7%나 증가했다.
러-우크라 사태 발생 직후인 3월에는 159.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 곡창지대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를 봉쇄했고, 수출용 곡물의 발이 묶이면서 전 세계 곡물시장이 크게 요동쳤다.
전 세계가 식량 수급 불안에 휩싸이면서 각 나라들은 자국의 식량 안보를 지키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세계 밀 생산 2위인 인도는 지난 5월 밀 수출을 제한했다. 식량 불안이 가중되자 자국시장 안정을 위해 밀 수출 규제에 나서면서 곡물 시장은 또 한 번 출렁였다.
팜유 가격이 급등하자 인도네시아 정부도 팜유 수출을 제한하면서 국내 식용유 가격이 급등했다. 대형마트 등에서는 제고가 바닥나는 등 식용유 대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러-우크라 사태로 식량 불안이 가중되자 각국의 식료품 수출 금지·제한 조치는 급속도로 확산했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에 따르면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불과 3개월 만에 27개국에서 45건의 식량·비료 수출 금지·제한 조치를 작동했다. 밀과 옥수수 등 주요 곡물 외에도 식용유·육류·유제품 등 다양한 식품 원재료가 포함됐다.
◆韓, 곡물자급률 20% OECD 최하위…공급망 무너지면 식량안보 '위태'
이러한 국제 식량 공급망 교란은 한국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국내 식료품 시장은 광물이나 에너지를 수입해 재가공하는 산업구조와 비슷하다. 식량 역시도 수입의존도가 높아 국제 곡물시장의 가격 변동성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보인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먹거리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들여왔다. 1990년대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70%에 달했지만 이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며 작년에는 45.8%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료용을 포함한 곡물자급률은 더욱 처참하다. 2020년 기준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20.2%로 20%를 겨우 넘겼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최하위에 위치하는 수치다.
같은 기간 통계청이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농산물 시장정보시스템(AMIS)의 국가별 생산량·소비량을 바탕으로 조사한 곡물자급률은 19.3%로 더 낮다.
한국은 주식인 쌀의 92.8%를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밀(0.8%), 옥수수(3.6%), 콩(30.4%) 등은 자급률이 매우 저조하다. 점점 소비가 줄고 있는 쌀은 남아돌고 있지만 수요가 늘고 있는 밀과 옥수수 등은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량 자급률 이행 목표 뒷걸음질…기후위기에 공급망 위기 계속
지난 2020년 기준 1717만t의 곡물을 수입하는 세계 7번째 곡물수입국으로, 2020년 기준 국내 산업에서 사용하는 원료 곡물의 수입 비중은 80%(79.8%)에 육박했다.
국가별 식량안보 수준을 비교 평가하는 세계식량안보지수(GFSI)는 2021년 32위로, OECD국가 중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수출 제한에 따른 전반적인 국제가격 상승은 수입 가격 및 국내 물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요국의 식량 및 비료 수출제한 조치에 따른 가격 상승이 국내 물가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결과 수출제한 조치 이후 비료와 곡물, 유지 가격이 각각 80%, 45%, 30% 상승했다.
이처럼 한국이 공급망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그 동안 자급률을 끌어올리는데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던 지난 2008년부터 밀 자급률을 10%까지 확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1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1%를 밑돌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교란에도 국내 식료품 시장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공공비축정책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이마저도 주변국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과거 대기근을 경험한 중국은 쌀, 밀, 옥수수, 대두 등 주요 곡물 소비량의 1년치를 중앙정부가 비축하고 있다. 안정적인 해외 공급망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도 쌀 100만t, 밀 2.3개월분(2021년 기준 93만t), 사료곡물 1개월분 이상을 쌓아두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수입 저율할당관세(TRQ) 물량을 포함해 연간 80만t의 쌀을 공공비축하고 있지만 밀 1만7000t, 콩 2만5000t 등 다른 곡물은 미미한 수준이다. 육류 소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료곡물 비축은 전무하다.
이처럼 식량자급률이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 이상기후가 일상화되면 한국의 식량안보가 더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더해진다. 국제 유가 등 원자재 가격, 고환율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 상황도 식량주권 확보에 장애요인이다.
이철호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명예이사장은 "전쟁이나 전염병, 경제제재 등으로 한반도가 봉쇄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몇 개월 만에 국민 대부분이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며 "자급률이 높은 쌀에 집중된 식량농업 정책으로는 전 세계적인 식량위기와 식량무기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만큼 보다 근본적인 장단기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호 명예이사장은 식량안보를 위한 장단기 정책으로 ▲저소득 취약계층에 대한 쌀 무상지원 제도 시행 ▲곡물 상시 비축과 비축시설 확장, 식량 콤비나트 건설 ▲민간기업의 해외 곡물유통사업 및 해외 농업 협력사업 지원 강화 ▲민간기업의 원료 재고량 확대를 위한 정부지원 강화 ▲생명공학기술 연구지원·활용 및 식품산업 육성, 푸드테크 선진화 등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우리나라는 곡물의 대외 의존도가 높아 국내 자급률 제고 노력에 더해 안정적인 해외 공급망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민간기업이 해외 곡물의 핵심 유통 시설을 확보하는 과정에 필요한 정부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협의해 적극적으로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안정적인 식량 공급망 강화를 위해 이르면 이달 중으로 '중장기 식량안보 강화 방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여기에는 재설정한 식량자급률 목표치와 국내 자급기반, 안정적인 해외공급망 확보 방안 등이 담길 예정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 농업사업을 간접 지원하는 방안과 함께 곡물 수급 안정을 위해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확보한 곡물을 반입할 수 있도록 해외 농업·산림자원개발협력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 비상시 해외에서 확보한 곡물을 국내에 신속히 반입할 수 있도록 사업자의 손실보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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