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선생은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도중 한글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어 문법을 정리했다. '독립신문' 발행과 각종 토론회, 만민공동회의 자료를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글로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라고 했다.
경술국치 후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해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해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1897년 '국문식',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저자 김삼웅은 책 '주시경 평전'(꽃자리)에서 주시경에 대해 비록 39년의 짧은 삶이었지만 민족만대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했다.
이 책은 주시경 선생의 출생과 성장기부터 사회·민족운동,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위원 참여, 한글연구까지 주시경 선생의 일생을 담았다.
책 마지막 부분에는 남한 학자와 북한 학자의 주시경 선생 평가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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