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아트1 성유미큐레이터 = “제 작업들은 제가 기억하고자 하는 공간,시간,의식으로 되돌려주는 시각적 일기입니다.”
피정원(28) 작가는 절제된 화면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단순하면서도 무한한 깊이감을 주는 검은 배경, 부식된 것 같이 표현된 형상들은 시각적이면서도 촉각적인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검은 배경은 작가의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자아를 뜻한다.캐나다와 미국을 거치며 유학생활을 했던 그는 머나먼 타지에서 외부인으로 살면서 ‘나’라는 주체에 대한 고민을이어갔고,그렇게 발견한 재료가 먹과 블랙 젯소이다.
동양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먹은 주재료로 사용되며 자신을 드러내는 반면,서양화에서 밑바탕으로 사용되는 블랙 젯소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작품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남과 숨김,서양과 동양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진 검은 배경은 유목민적 특징을 가진 작가를 그대로 닮았다.
검은 여백은 작품 속 나타나는 형상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균열과 굴곡으로 이루어진 마티에르는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다양한 재료의 조합과 덧칠을 통해 만들어진 크고 작은 균열들은 작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순간을 의미한다.우연히 마주한 하늘의 색,땅에 길게 내려앉은 그림자,갈라진 땅의 텍스처 등자신만의 주관적인 경험들을 캔버스에 옮겨 담은 것인데,이 과정에서 나타난 겹겹의 층들은 내면 의식의 시각적인 형태다.
“재료의 특성과 기억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균열 위에 여러겹으로 지속적인 덧칠을 합니다.이 반복적인 행위는 불완전한 균열 속에 완전한 매제를 더함으로써 재료의 실질적 견고함을 더하고,자각 없는 의식을 완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저의 시각적 실천입니다.”
그의 작업 노트는 재료에 대한 연구로 가득 차있다.작업에는 시멘트 가루,오일,아크릴 등이 사용되는데,온도와 습도에 따라 달라지는 균열과 번짐의 정도를 테스트하고,원하는 바와 최대한 흡사하게 나올 때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마티에르의 두께감이나 매트함,갈라짐과 번짐의 정도까지 모두 계산된 결과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담겨있지만,작품의 감상은 모두 관람자의 몫으로 넘겼다.관람자의 경험에 의해 해석이 되고 수용될 때 ‘합’이 된다고 보는 그는 온전한 추상적 경험을 위해 100호 이상의 대작을 위주로 작업을 한다.
“제가 영감을 얻는 부분 중에 하나는 ‘벽화’입니다. 인류의 첫 미술적 표현이기도하고 자기의 일기를 온전히 담는다는 관점에서도 닮은 것 같습니다. 때문에 벽이라는 느낌을 받게 하기 위해서 큰 캔버스를 선호합니다. 또한, 크기가 주는 위압, 압도감은 작업 관람의 집중력과 추상적경험에 큰 도움이 됩니다.”
감상을 위해 방해가 되는 제목도 최대한 배제한다. “아무리 추상적인 작업이어도 작품명을 보는 순간 작업은 추상적인 감상을 방해받게 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작품명은 추상적인 요소를 가장 노골적으로 알려주는 작가의 힌트이기 때문에 ‘Untitled’는 저에게 제목을 안 정한 것이 아닌 ‘무제’라는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고도의 정신성을 담은 듯한 그의 작업은 뉴욕 미술계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선입견을 시험한다”(마리오네이브스,미술비평가), “질감표현에 의한 물질성이 흥미롭다”(나네트 카터,미국 아티스트)는 평을 받으며 전도유망한 작가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본인의 작업이 동양적 느낌이고, 한국에서는 추상이 기본으로 되어있는 작업이라 서양적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저와 같이 제 작업은 유목민과 같은 특징을 갖게 되었고, 이는 여러 곳에서 매력적으로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국내 활동으로는온라인 작가 발굴 프로그램 ‘2021 아티커버리’에 참여하기도 했는데,단순하면서도 깊이감 있는, 재료의 물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좋은 평을 받으며 TOP 9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현재 하반기에 있을 전시와 페어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최근에는 흘러내리는 드리핑 형태의 마티에르를통해 작품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또한 작업의 사이즈도 다양하게 변경하며 추상적 표현방식에 대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술을 많이 접하지 않은 분들께는 처음으로 추상적 경험다운 경험을 시켜준 작가, 작품을 애호하는 분들께는 작품에 진실성이 있고 작품성이 있는 깊고 깊은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