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집권 말기 헌법·당규약서 '공산주의' 삭제
김정은 업적서 '공산주의' 용어 재등장하더니
올 들어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부쩍 강조
자력갱생 속 '만리마' 대신 '천리마' 회귀
주민 희생을 유토피아 믿음으로 정당화
안녕하십니까. 뉴시스 북한팀 박수성입니다.
한미 정상회담이 내일 열릴 예정입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며칠 전 이번 회담에서 북한 문제가 중심 의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얼핏 무시하는 듯한 태도입니다만 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에 따르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군에 특별경비근무 기간을 선포하고, 1호 전투근무 태세를 발령한다는 총참모부의 지시가 하달됐다고 합니다. 회담에서 “어떤 모략을 할지 모르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거지요.
북한도 한미 정상회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만 그런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진 않겠다는 것 같네요.
연초 8차 당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국에 대해 '강대 강, 선대 선의 원칙'에 따라 대응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 발언에 대해 북한이 미국에 새로운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해석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경과를 보면 북한은 올 들어 비교적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등이 나서서 험한 말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 우리를 자극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대 강, 선대 선의 원칙'이니까 적어도 미국이 북한을 자극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얌전해진' 북한이 요즘 무얼 강조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노동신문 읽기를 시도했습니다.
화끈한 이슈가 없을 때마다 '창 넘어 북한'이 면피 삼아 해온 작업입니다만 올해 노동신문을 다시 꼼꼼히 읽어 보니 전엔 몰랐던 새로운 움직임이 잡혔습니다.
북한이 새삼스럽게 공산주의를 강조하고 나선 겁니다.
북한에서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김정일 집권 말기인 2009년 4월 개정된 헌법에서 모두 삭제됐습니다. 1998년 9월에 개정한 헌법에는 3개 조문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중략) 창조적 로동에 의하여 건설된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지운 겁니다.
1년 뒤엔 헌법보다 중요하다는 노동당 규약에서도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표현을 삭제했습니다. 그 뒤 상당 기간 동안 북한에선 공식적으로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공식 담화에 다시 등장한 건 2016년 열린 7차 노동당대회 직전입니다.
2016년 3, 4월에 노동신문이 “공산주의자로서의 노동당원”이라는 표현을 쓰고 평양에 새로 조성한 여명거리를 ‘공산주의 이상거리’라고 부르는 등으로 ‘공산주의’ 용어를 부활시켰습니다.
특히 2020년 9월 8일 열린 '태풍피해 복구 평양 수도사단 궐기대회'에서 리일환 노동당 근로단체부위원장은 김정은을 "공산주의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로 인도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은은 이른바 '혁명의 성지'라는 양강도 삼지연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자신의 제1의 업적으로 내세워 왔습니다. 삼지연 공사 현장을 '현지 지도'한 일이 여러 번입니다. 그중 2018년 7월에 방문한 자리에서 삼지연을 “공산주의 리상향”이라고 부른 겁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요즘만큼 자주 언급되진 않았습니다. 맥락상 필요성이 있을 때만 띄엄띄엄 등장한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특히 최근에 노동신문이 부쩍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5월 17일자 사설은 “모두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한마음 한뜻으로 충직하게 받들어 사회주의건설의 새 승리, 공산주의의 찬란한 미래를 앞당기자”로 마쳤고요,
10일자 사설은 ‘따라앞서기, 따라배우기, 경험교환운동’이 “전체 인민을 열렬한 애국자,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키우는”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14일자 1면에 실린 정론 ‘인민의 심부름군당’에서는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15번이나 나옵니다. 특히 김 위원장이 직접 “공산주의사회는 모든 인민들이 무탈하여 편안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사회,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돕고 이끌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공산주의 미덕과 미풍이 확립돼 있는 사회”라고 설명했다고 소개하고 있네요.
지난 4월에 열린 당세포비서대회에선 당세포비서들이 앞장서서 공산주의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공산주의를 부쩍 강조하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저명한 소련 공산주의 연구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집단화 정책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국가가 주민들에게 요구한 희생을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을 내세워 정당화했다'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주민을 들들 볶는 동원 체제에 의존해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동원 체제가 오래 지속되면 주기적으로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익숙해진 일에는 그저 그러려니 심드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공산주의 구호가 주민을 동원하기 위한 새로운 구호가 되는 셈입니다.
북한은 국가발전단계를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로 보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로서 현재 사회주의 단계에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최근 공산주의를 부쩍 강조하는 건 코로나니 미국의 제재니 여러 이유로 북한이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김정은 총비서의 영도따라' 8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경제사회발전 계획을 달성하면 머지않아 공산주의 이상사회가 도래할 것임을 암시하려는 것 아닐까 싶네요.
특히 올해 집권 10년을 맞은 탁월한 지도자 김위원장한테 모든 주민이 열과 성을 다해 충성하면 김위원장이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대놓고 장담은 하지 않지만 그렇게 믿고 따르라는 식인 거지요.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노동신문이 최근 김위원장 우상화를 위한 글도 부쩍 자주 싣고 있는 겁니다. 이 대목은 뒤에 별도로 다룰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북한 움직임에 대해 외부에선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지난 17일 열린 한 토론회에서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이 올해 집권 10년이 됐지만 전반 5년에 비해 후반 5년이 경제 실적이 크게 나쁘다고 평가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회주의 경제의 고질적 병폐인 중앙집권적 경제운영을 강화하고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강조하는 등 퇴행적 요소가 나타난다면서 낙후한 이데올로기나 새로운 선동 구호를 내세워 경제에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지만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낙제점을 매긴 겁니다.
북한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뤘다고 자평하는 1950-60년대에 '천리마운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천리마운동은 스탈린 시절 구소련의 '스타하노프운동'이나 마오쩌둥 시절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모방한 주민동원에 의존한 경제운영방식입니다.
소련은 사라졌고 중국도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화가 크게 진전됐기에 두 나라에서 더 이상 주민 동원 위주의 경제운영방식은 사라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현재는 그런 식으로 경제를 꾸려나가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김정은은 오히려 한 술 더 뜨기도 했습니다.
김정은 시대 초기엔 ‘만리마 속도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천리마보다 열 배나 빠른 만리마처럼 열심히 일해 경제 발전을 앞당기자는 구호였습니다.
3년 전 김정은이 문대통령한테 김여정이 이끄는 부서에서 만든 표현이라고 설명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만리마운동'이라는 구호가 싹 사라졌습니다.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한 끝에 2020년부터는 자력갱생으로 '정면돌파전'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천리도 버거운데 만리를 추구하는 게 말도 되지 않는다고 자체 평가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동신문은 지난 5일자 1면 사설 ‘전후복구건설시기와 천리마시대 영웅들처럼 살며 투쟁하자’에서 “이것이 당의 호소이고 시대의 부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만리마에서 천리마로 돌아가고 쓰지 않던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부활시킨 북한에서 경제 성과가 나타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창 넘어 북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yjkang1@newsis.com, pzcmaria@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