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문학과지성사가 1978년 시작한 문지 시인선의 열린 미래를 향해 새로운 모색과 도전을 시작한다. 첫 기획은 시대와 세대를 가로지르며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온 여성 시인 최승자, 허수경, 한강, 이제니의 시집과 현재 가장 개성적이고 주목받는 작업을 펼치는 여성 북디자이너 김동신, 신해옥, 나윤영, 신인아가 만나 특별한 문지 시인선을 선보인다.
이번 시집 디자인 페스티벌에 함께한 북디자이너들은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디자인적 해석으로 운문 본래 리듬과 정서를 존중하면서 2020년 새로운 시 텍스트 해석에 신선하고 도전적인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시대의 사랑
격동의 80년대를 청춘의 이름으로 관통해온 이들에게 시인 최승자는 처절한 분노로, 치명적인 중독으로, 그리고 가슴 먹먹한 이름으로 자리한다. 데뷔 시로 첫 시집의 제목을 삼은 『이 시대의 사랑』(1981, 2020년 12월 현재 통쇄 51쇄)에서 최승자는 정통적인 수법의 서정시 속에서, 그러나 정통적인 수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뜨거운 비극적 정열을 뿜어 올리면서 이 시대가 부서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이 호소는 여성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사랑과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언어적 결단이기도 하다. 88쪽, 1만2000원.
◇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1992. 통쇄 32쇄)은 세간의 비참과 내면의 허기를 노래해온 허수경의 시집이다. 일말의 포즈 없이 진정성을 향한 열망으로 씌어진 시편들은 하나같이 버림받다, 아프다, 무너지다 같은 절망적 어사들로 짜여 있으나 동시에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불취불귀不醉不歸」) 살아가려는 의지 또한 드러낸다. 그것은 "아린 손가락 끝으로 개나리가 피"('쉬고 있는 사람')어나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울고 있는 가수')는 애처로운 다짐으로 이뤄진다.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은 일은 삶의 지속이 곧 상처의 증식임을 인지하면서도 이를 기꺼이 수용하며 나아가는 시적 고행을 조심스레 뒤따라보는 과정이다. 90쪽, 1만2000원.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생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깊은 어둠 속에서 발견해낸 빛을 단단하고 투명한 목소리로 담아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 통쇄 34쇄)는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에 단편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한강이 등단 20년 차를 맞던 2013년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중 60편을 추려 묶어낸 시집이다. 부서지는 육체의 통각을 올올이 감각하면서도 쓰고 사는 존재로서 열정에 불을 지피는 시적 화자의 거대한 생명력은 읽는 이에게 무한한 영감과 용기를 북돋웠고, 출간된 지 7년이 조금 넘은 시간 9만 부에 가까운 책이 독자들에게 가닿았다. 51쪽, 1만2000원.
◇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어제의 마음에서 태어난 오늘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시인 이제니의 세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2019. 통쇄 9쇄)에서 시인은 "어제의 여백"을 돌아본다. 상실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흔적들, 오래 품고 있던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은 이제니의 시에서 문장들 사이사이 문득 끼어드는 어떤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그 목소리들은 한 개인의 목소리이자 그 개인이 지금껏 겪어온 모든 사람, 헤쳐온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시인은 위로하듯 받아쓴다, 자신 안에 있는 자신과 자신 아닌 모든 목소리를. 담담하게 숙성된 61편의 목소리들이 담겼다. 163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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