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 수상 깜짝 등단
'바보산수'화가 김기창과 결혼 '부부 화가' 1호
피난생활중 입체파 탐구 '노점' 작업 대통령상 수상
1969년 미국으로 유학 추상 판화 국채 최초 도입
태피스트리·판화가로 변신...1976년 간암으로 타계
덕수궁미술관, 탄생 100주년 '박래현, 삼중통역자'전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77년전 시작된 이야기다. 남성 화가들이 약진하던 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은 그야말로 한국화가들의 경쟁장이었다. 1922년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명 '선전'으로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거쳐갔다.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김용진의 입상을 시작으로 이상범 잉응로 김기창 장우성등이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지금은 국내 한국화단의 거목들로 한국미술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화가들이다.
남성화가들의 승승장구속 1943년 열린 조선미술전람회는 깜짝 놀랐다. 총독상에 뽑힌 그림은 '단장', 여성화가였다.
이름은 박래현. 신여성 화가의 존재감은 한국화의 새 이름이었다.
◇1943년 '단장' 조선미전 총독상 ...신 여성화가 박래현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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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193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이듬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에 입학했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받은건 대학교 4학년때다.
‘거울을 보는 여성’을 그린 작품 제목은 단장(화장). 당시 박래현의 하숙집 딸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이런 그림은 일본 미인도에서 즐겨 다루어지던 화풍이었다.
배경이 없는 큰 화면에 검은 옷의 소녀와 붉은 화장대만 마주 보도록 대담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화장대 위의 화장솔과 소녀의 손에서는 섬세한 세부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인물화에서 탄탄한 기초를 쌓은 박래현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화 여성 화가로 스타로 부상한 그의 '세계관'은 사랑과 함께 확장됐다.
우향 박래현(1920~1976)은 한국화 1호 부부다. 총독상을 탄 '단장'은 박래현의 인생도 새롭게 '단장'시켰다.
조선미전 시상식을 위해 귀국했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훗날 '바보산수'로 유명해진 김기창. 1938년 조선미전에서 수상한 그림 선배였다.
1947년 김기창과 결혼은 당대 화제였다.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한 박래현과 청각장애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김기창의 연애사는 지금도 '미술계 전설'로 남아있다.
◇사랑 고백도 먼저...김기창과 '부부화가' 국내 최초 '부부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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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전의 추천작가였던 김기창에게 인사를 하러 간게 인연이었다. 종아리가 예쁜 박래현에 반했지만, 가진게 없어 남자는 주저했다. 훤칠한 김기창의 외모에 반한 건 박래현이었다. 청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화가로 살 수 있게 해달라"
여자가 먼저 사랑고백을 하자 일곱살 많은 화가 김기창은 박래현에 푹 빠졌다.
"각자의 예술세계를 인정하되 간섭은 하지말자"
그 약속과 함께 1946년 남산 민속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년후 국내 최초로 부부전시도 열었다. 금슬은 공고했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운보 김기창과 12회의 부부전을 열었고 중진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하여 동양화단을 이끌었다.
'박래현' 하면 유명한 그림은 교과서에도 나와 익숙한 '노점'이다. 마치 피카소가 그린 것 같은 입체파 분위기가 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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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은 1956년 탄생했다. 그해 11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남편 김기창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친정인 군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을때를 그린 그림이다.
박래현은 피난생활을 하면서 입체주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화풍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을 보여준다.
시장을 오가며 마주친 평범한 풍경을 그렸지만 담채의 맑은 색상,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색면, 예리한 필선에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평소 생활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색상의 배합에 예민한 감각을 집중했던 여성화가 박래현의 성향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노점'이 그려진 그 해 1956년은 박래현의 전성기였다. 막내딸을 출산하고 네 아이의 엄마가 되기도 했지만 붓을 놓지 않았다. 5월에 김기창과 나란히 부부전을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화풍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한 달 뒤엔 6월에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화가 부인→4명 아이의 엄마...화가로서 3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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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는 신 여성 화가의 번민은 컸다. 화가에서 부인이 되고 엄마가 됐지만, 화가는 포기할수 없는 일이었다.
늘 가사에 쫓겨 작품 제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며 고뇌는 깊어졌다.
"내가 예술가라 할 수 있는가"
고민도 잠깐,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을 쪼개어 가며 작품을 제작했고, 부부전과 백양회 회원전을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달랐다. 사람들은 그를 ‘김기창의 아내’, ‘김기창과 같은 길을 가는 부인’이라 불렀다.
그렇다고 가사의 굴레와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았다. 생활 속에서 예술의 주제, 재료, 기법을 찾아내며 새로운 동양화를 탐구했다.
매년 부부전을 함께했고 많은 수의 합작도를 제작했다.
대부분 소품으로 그린 화조화인데, 전성기때인 1956년에 그린 4폭의 연폭 병풍 '봄C'(아라리오컬렉션)가 남아, 부부의 예술열정을 전한다.
167×248cm 크기 보기 드문 규모의 합작도다. 많은 수의 합작도가 전해지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 부부’로서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던 이들의 그림이 인기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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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은 박래현과 김기창이 입체주의를 수용한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선보이면서 화단에 큰 획을 그었던 해이다.
연이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해외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히고 추상화로 작품을 전향했다.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작업하고 싶다"
아이 낳고 키우며 그림을 그리며 입버릇처럼 나온 말.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하고 남편 운보와 중남미를 여행한 뒤였다.
남편은 아내의 그 허한 심정을 알아봤다.
"그림을 계속 그려라"
1969년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가 4명, 나이 49세였다.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와 봅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들어가 한국화가 아닌, 새로운 조형 작업을 실험했다.
동판을 긁고 파서 색을 입혀 한국적 소재를 기하학적으로 풀어내는 추상판화는 한국 작가 최초 시도였다. 1974년까지 뉴욕에 머물며 판화와 타피스트리 작업에 몰두했다.
이후 다시 동양화 작업을 재개하고 미국의 판화전에 참석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펼쳤으나 갑작스럽게 간암이 발병하여 1976년 1월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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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부유한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 화가가 된 신 여성. 우향 박래현은 근대기 여성화가 첫 세대 작가로 한국미술사를 개척했다.
식민지 시기 일본화를 수학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했고,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를 탐구한 미술가다.
특히 섬유예술이 막 싹트던 1960년대 박래현이 선보인 태피스트리와 다양한 동판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에 선보인 판화 작업들은 한국 미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으로 꼽힌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박래현은 낯설다. 가부장제 시대는 ‘박래현’이라는 이름대신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김기창의 아내’라는 수식이 더 크게 부각됐다.
화가이자 화가의 아내였던 박래현이 아닌 20세기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여성작가로 부활한다.
하다만 작업을 두고 56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림과 함께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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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올해는 박래현 탄생 100주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00주년을 기념한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을 덕수궁 전관에서 29일 개막했다.
'예술가 박래현'의 성과를 조명한다. 그의 선구적 예술작업이 마땅히 누렸어야할 비평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전시다.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등 작품 총 138점이 35년 만에 대거 공개됐다.
전시명인 ‘삼중통역자’는 박래현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표현한 명칭이다.
미국 여행에서 박래현은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하여 다시 구화와 몸짓으로 김기창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여행에 동행한 수필가 모윤숙이 그 모습에 관심을 보이자 박래현은 자신이 ‘삼중통역자와 같다’고 표현했다.
박래현이 말한 ‘삼중통역자’는 영어, 한국어, 구화(구어)를 넘나드는 언어 통역을 의미하지만, 이번 전시에서의 ‘삼중통역’은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지었던 그의 예술 세계로 의미를 확장했다.
이 전시는 근대기 신 여성 화가였던 박래현의 도전을 따라간다. 1부 한국화의 ‘현대’, 2부 여성과 ‘생활’, 3부 세계여행과 ‘추상’, 4부 판화와 ‘기술’로 선보인다.
미술사학자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오랫동안 박래현의 작품을 비장(秘藏)했던 소장가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평소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 대거 전시장으로 ‘외출’했다”고 전했다.
화가는 '불멸의 삶'이다. 그것을 빛내는 건 소장가들. 이번 전시도 박래현 그림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소장가들의 '사회공헌' 덕분이다. 결국 미술품은 개인의 것이 아닌 공공미술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오는 10월8일 10월 오후 4시부터 약 40분간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작품 설명이 미술관 유튜브에서 중계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박래현 전시는 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2021년 1월 3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